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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중동

슈우비야, 현재로 소환된 과거의 망령(2): 아랍 민족의 적은 누구인가

by katib 2020. 12. 31.

이전 글에서 이어진다.

 

20세기, 하나의 망령이 중동을 배회하기 시작했다. 슈우비야라는 망령이.

 

머나먼 압바스 시대 과거의 이야기인줄 알았던 슈우비야는 20세기 아랍 민족주의와 함께 다시 돌아왔다. 그러나 그 성격은 더 이상 과거와 같지 않았다. 20세기에 슈우비야로 지칭되는 대상은 페르시아만이 아닌, 아랍 민족주의 이념에 반하는 모든 이념과 세력이었다.

 

1950년대의 '슈우비야'는 공산주의자였다. 1945년 시리아의 아랍 민족주의 정당 바아쓰(Ba'ath)당은 시리아 공산당을 '슈우비야의 축'이라고 불렀으며, 이라크의 아랍 민족주의 세력 또한 공산당이 아랍 통합을 깨뜨리려는 '슈우비윤(Shu'ubiyyun)', 즉 슈우비야의 추종자라고 비난했다(Davis 122; Hannad and Garder, 335). 이라크 바아쓰당은 1945년 5월 1일 발표한 성명서에서 공산당을 "슈우비야 세력의 방패막이자 외세의 나팔수"라고 칭했다(Makiya, 217). 이라크 바아쓰당의 압둘 하디 알푸카이키(Abd al-Hadi al-Fukayki)에게도 공산당은 슈우비야 세력이었다. 아랍인과 비아랍인 모든 노동자의 단결과 투쟁을 호소하는 공산주의는 아랍 통합과 통일 아랍 국가 건설에 저항하는 이념이었고, 따라서 공산당은 곧 아랍 민족의 적, 슈우비야였다(Hannad and Garder, 349).

 

때로는 이라크와 시리아의 아랍 민족주의 세력이 서로를 향해 아랍 통합과 대의를 거스르는 적, 즉 슈우비야라고 지칭하기도 했다. 한 예로 1965년 이라크의 압둘 살람 아리프(Abd al-Salam Arif) 대통령은 시리아 바아쓰 정권을 가리켜 분열주의자이자 슈우비야 세력이라고 불렀다(Hannad and Garder, 335)

 

아니스 사이그(Anis Sayigh), 무스타파 알쉬하비(Mustafa al-Shihabi)와 같은 20세기 아랍 민족주의 지식인들에게는 아랍 지역을 지배했던 오스만 제국과 서구 역시 슈우비야였다. 아니스 사이그는 오스만 제국이 아랍을 지배하고 자유와 독립을 억압했을 뿐만 아니라, 20세기 들어서는 아예 아랍 문화와 정체성, 언어, 역사를 말살하고 강제로 투르크인으로 만들려고 한 슈우비야라고 비판했다. 알쉬하비는 1908년 투르크어를 제국의 공식 언어로 선포한 헌법, 아랍 문자를 버리고 라틴 문자를 차용하고 터키어에서 아랍어 차용어를 제거한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의 개혁이 바로 현대의 슈우비야 운동이라고 주장했다(Hannad and Garder, 343).

 

서구화(taghrib) 역시 아랍 민족의 정체성과 문화를 위협하는 슈우비야였다. 알푸카이키는 "아랍 사상과 문화를 거부하고 아랍인을 교육하기 위해 서구의 지적 유산에만 의존하는" 지식인인들을 슈우비윤, 즉 슈우비야의 추종자라고 비난했다. 알푸카이키에 따르면 현대의 슈우비윤들의 목적은 "아랍 민족주의를 따르지 않고 아랍 문화와 사상, 문명을 거부하며 아랍 민족의 지적, 문화적, 교육적 유산을 거부하는 세대"를 양성하는 것이다. 한편 통일 아랍 국가가 아닌 개별 아랍 국가의 특수성과 독립을 추구하는 경향 역시 슈우비야로 치부되었다. 아랍 민족주의보다 이라크 민족주의를 추구한 이라크 대통령 압둘 카림 카심(Abd al-Karim Qasim)은 '아랍을 분열시키는 자(Qasim al-Arab)'이자 '슈우비야 독재자'였다(Bengio, 104). 알푸카이키는 안툰 사아다(Antun Sa'adah)와 같이 시리아의 고유한 정체성과 문화, 역사, 특수성을 강조하고 시리아는 '아랍 통일 국가'의 한 부분이 아니라고 주장한 시리아 민족주의자들을 슈우비야로 지칭했다(Hannad and Garder, 346-347). 공산당과 서구주의자, 아랍 각국의 민족주의자 외에도 알푸카이키에게 슈우비야의 추종자들은 이란인, 터키인, 흑인, 인도인, 스페인인, 로마인까지 "아랍인에 대한 증오와 이슬람에 대한 반감"을 공유하는 다양한 집단을 아우르는 집합이었다(Bengio, 104).

 

슈우비야의 망령이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한 지역은 바로 20세기 이라크였다. 이란과 바로 맞닿은 이라크의 아랍 민족주의자들에게 슈우비야는 곧 아랍인, 더 나아가 아랍인 예언자가 계시한 신앙인 이슬람에 대한 페르시아인의 뿌리 깊은 적의를 상징하고 환기시키는 개념이었다. 알푸카이키에게 슈우비야는 곧 압바스 시대 이전부터, 이슬람이 등장한 그 순간부터 아랍인과 이슬람에 적의를 품고 아랍 무슬림 공동체에 몰래 침투한 페르시아인들의 음모였다(Makiya, 218). 마찬가지로 이라크 역사가 압둘 아지즈 알두리(Abd al-Aziz al-Duri)는 1962년『슈우비야의 역사적 기원(Al-judhur Al-Tarikhiyyah al-Shu'ubiyyah)』에서 슈우비야를 "아랍인의 지배권을 뒤흔들고 이슬람을 약화시키며 아랍 이슬람 문명의 흐름을 막기 위한 비아랍인들의 집단적 시도"로 정의한다(Al-Duri, 13). 에릭 데이비스(Eric Davis)는 슈우비야에 대한 알두리의 분석이 슈우비야 운동의 실제 역사에 관한 학술적인 연구보다는 논쟁적 저술에 가깝다고 평한다(Davis, 131). 알푸카이키와 알두리가 제시한 슈우비야에 대한 새로운 정의와 이해는 20세기 이라크 아랍 민족주의들이 표방한 랍과 페르시아, 이슬람과 이슬람의 적을 철저히 구분하는 배타적이고 이분법적인 세계관을 반영한다. 

 

압둘 아지즈 알두리의 『슈우비야의 역사적 기원』

 

1980년 바아쓰 정권의 지도자 사담 후세인이 이란을 침공하면서 이라크와 이란의 전쟁이 발발하자 바아쓰 정권과 친정권 지식인들의 담론에서 슈우비야가 차지하는 중요성은 더욱 커졌다. 바아쓰 정권은 슈우비야라는 개념을 이용해 이란과의 전쟁을 아랍과 이슬람의 영원한 적인 페르시아에 맞서 아랍과 이슬람을 수호하기 위한 성전(聖戰)으로 승화시키고 정당화했다. 바아쓰 정권이 구성한 세계관에서 슈우비야는 압바스 시대와 현재를 연결하는 수단이 되었다. 과거 압바스 시대 페르시아인들이 슈우비야 운동을 통해 아랍 이슬람 문명을 내부에서 붕괴시키려 했듯이, 현재 이란 역시 이라크와 아랍, 이슬람의 생존과 존립을 위협하는 적인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사담 후세인은 이란-이라크 전쟁 기간 여러 차례 슈우비야를 언급하며 바아쓰 정권의 세계관을 국민들에게 주입시키고 전쟁을 정당화하고자 했다. 사담 후세인은 1983년 연설에서 슈우비야 세력을 "아랍인과 아랍 민족, 아랍인의 영광과 연대에 증오를 품고 있는 자들"(Jawad, 53)로 정의하며 이란과의 전쟁이 바아쓰 정권과 이라크뿐만 아니라 전 아랍 민족을 지키기 위한 전쟁임을 강조했다. 사담 후세인은 또한 이란의 위협을 "아랍 지역을 노리는 가장 강력하고 적의에 가득 찬 슈우비야의 거대한 폭풍"에 비유했다. 1980년대에는 또한 이라크-이란 관계 역사 전체를 슈우비야의 관점에서 분석하는 책들도 출판되었다. 이 책들은 페르시아인들이 역사에 걸쳐 이라크를 위협해왔으며, 압바스 시대의 슈우비야 운동은 페르시아인들이 이라크와 아랍인에게 드러낸 적의의 역사 중 일부일 뿐이라고 주장한다. 심지어 1989년 출판된 『사담 후세인과 아랍 역사의 진실(Saddam Husayn wa Haqa'iq al-Tarikh al-'Arabi)』라는 책은 이라크와 페르시아의 대립이 고대 바빌로니아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고 말한다. 바빌론의 네부카드네자르가 팔레스타인을 점령해 유대인을 포로로 잡아오고, 페르시아의 키루스가 바빌로니아를 멸망시키고 유대인을 풀어준 역사는 이슬람 이전부터 페르시아인과 유대인들이 이라크 문명을 적대해왔다는 '역사적 근거'로 제시된다(Davis, 185-187)

 

역사적으로 페르시아(20세기 이후에는 이란)와 밀접한 관계를 맺어온 이라크 쉬아파들은 항상 의심의 대상이었으며, 이라크 국내의 슈우비야 세력으로 간주되기도 했다. 쉬아파에 대한 의심은 바아쓰 정권 수립 이전부터 이라크의 순니파 지도부 내에서 존재했다. 왕정 시기 이라크의 교육 과정을 총괄한 사티 알후스리는 쉬아파 시인인 무함마드 알자와히리(Muhammad al-Jawahiri)가 진정한 이라크인이 아니고 그의 시가 '슈우비야'적이라고 비난하며 알자와히리를 교사로 임용하기를 거부했다(Saleh, 62). 바아쓰 정권 역시 이라크 쉬아파를 신뢰하지 않았다. 1971년 바아쓰 정권은 페르시아계 이라크인 - 이라크에서 여러 세대에 걸쳐 살아온 - 6만 명을 '이란인'이라는 이유로 강제 추방했고, 전쟁이 발발한 1980년에는 4만 명을 추방했다(Saleh, 66-67). 이들 대다수는 19세기 오스만 국적을 취득하지 않은 쉬아파들의 후손이었다. 이란의 하수인인 이라크 쉬아파가 슈우비야 세력의 일원으로서 바아쓰 정권을 위협하고 있다는 인식은 1982년 바아쓰당 내에서 회람된 문서에서도 드러난다. 이 문서는 이란의 목적이 "이라크를 약화시키고 슈우비야 세력(즉 쉬아파)을 이라크의 지도부로 세우는 것"이라고 분석했다(Bengio, 105).


2003년, 미국 주도 다국적군의 침공으로 사담 후세인 정권은 무너졌다. 그러나 슈우비야의 망령은 여전히 중동을 떠돌고 있다. 2000년대 이후 중동 내 이란의 영향력이 확대되자, 걸프 아랍 국가를 중심으로 다시 슈우비야의 역사적 기억이 소환되어 이란을 주축으로 하는 슈우비야 세력이 아랍을 위협하고 있다는 인식이 등장했다. 레바논 헤즈볼라와 팔레스타인 하마스, 예멘 후티 반군, 이집트의 무슬림형제단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세력으로 구성된 슈우비야 진영이 이란과 터키의 이익에 봉사하며 아랍을 위협하고 있다는 사우디 언론인 압둘라 븐 빈자드 알우타이비, 이슬람주의 정치운동을 아랍 국가를 위협하는 새로운 슈우비야로 규정한 튀니지 언론인 알하비브 알아스와드, 중동 내 이란의 영향력 확대를 '새로운 페르시아의 슈우비야'로 규정한 사우디 언론인 함마드 알살라미 슈우비야는 많은 아랍인들에게 지나간 과거가 아니라 오늘날 아랍인들이 직면한 현재의 문제다. 과거는 이렇게 묘한 방식으로 현재와 연결된다. 


참고문헌

 

Al-Duri, Abd al-Aziz. 1962. الجذور التاريخية للشعوبية (Al-judhur Al-Tarikhiyyah al-Shu'ubiyyah). Beirut: Dar al-Tali'ah.

Bengio, Ofra. 1998. Saddam’s Word: Political Discourse in Iraq. 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Davis, Eric. 2005. Memories of State: Politics, History, and Collective Identity in Modern Iraq. Berkeley and Los Angeles: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Hanna, Sami A. and George H. Gardner. 1966. "Al-Shu‘ūbiyyah Up-dated: A Study of the 20th Century Revival of an Eighth Century Concept." Middle East Journal 20, no. 3: 335-351.

Jawad, Ferida. 1997. "The Triumph of Arabism: The Shu‘ūbiyyah Controversy and the National Identity of Modern Iraq." Jusūr 13: 53-87.

Makiya, Kanan. 1998. Republic of Fear: The Politics of Modern Iraq. Berkeley and Los Angeles: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Saleh, Zainab. 2013. "On Iraqi Nationality: Law, Citizenship, and Exclusion." Arab Studies Journal 21, no. 1: 48-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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