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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사/중간기

슈우비야, 현재로 소환된 과거의 망령(1): 슈우비야의 시작과 끝

by katib 2020. 12. 21.

슈우비야(Shu'ubiyyah) 운동은 압바스 시대 초기 페르시아계 무슬림을 중심으로 아랍 무슬림의 우월적 지위에 도전하는 경향 또는 운동이었다. '슈우비야'라는 단어는 코란 49장 13절에 나오는 '민족들(shu'ub)'이라는 단어에서 비롯되었다. 페르시아 주석가들은 '슈웁'을 아랍 부족인 '카바일(qaba'il)과 대응되어 '도시나 마을에 정착한 비아랍인'을 가리킨다고 해석했다(Mottahadeh, 168-171). 코란이 아랍 부족과 비아랍인들을 구분한다고 해석한 페르시아계 무슬림들은 곧 코란이 무슬림 공동체 내에 아랍인 이외의 다른 문화와 언어를 사용하는 민족집단의 존재를 허용한 것이라고 생각했다(Mottahadeh, 182)

 

"사람들이여, 우리는 너희를 남자와 여자로 창조했고

부족과 민족으로 만들었으니

이는 너희 서로가 서로를 알게 하기 위함이다."

코란 49장 13절

 

슈우비야 운동의 배경에는 아랍 무슬림과 비아랍 무슬림 사이의 사회적 지위 차이가 있었다. 이슬람은 신 앞에서 모든 사람들의 평등한 위치를 계시했지만, 실제로는 정복 이후 이슬람으로 개종한 비아랍인과 아랍 무슬림 사이의 지위는 평등하지 않았다. 7세기까지 거의 모든 무슬림은 아랍인이었고(다만 모든 아랍인이 무슬림은 아니었다), 이슬람은 아랍인에 의한, 아랍인을 위한, 아랍인의 종교였다(Berkey 74-75). 이슬람 이전부터 존재하던 아랍 부족의 우월 의식은 이슬람 이후에도 유지되었고, 아랍 부족주의와 이슬람의 평등주의적 메시지 사이 불협화음이 나타났다(Agius 77-78)

 

우마이야 시대(661-750년) 비아랍인이 이슬람으로 개종하기 위해서는 무슬림 아랍 부족의 '피보호자(마왈리, mawali)'가 되어야 했다. 아랍 부족의 피보호자로서 마왈리는 따라서 아랍 무슬림과 동등한 지위로 인정받을 수 없었다. 한편 마왈리는 경제적으로도 차별을 받았다. 정통 칼리프 시대와 우마이야 칼리프조 초기 납세자는 비무슬림에게 부과되는 인두세인 지즈야(jizyah)와 토지세를 내는 비아랍인 농민들이었다. 아랍인 정복자들은 병영도시(misr)에 비아랍인과 분리된 채 살았고, 세금을 내지 않으며 군적(軍籍)에 이름을 올려 군인으로서 전리품을 획득하거나 국가로부터 일종의 연금을 받았다. 이와 같은 구조는 개종 증가, 마왈리 농민들의 도시 이주 확대 등의 변화로 흔들리기 시작했다. 지즈야와 토지세를 내야 하는 비무슬림 비아랍인이 줄어들기 시작한 것이다. 이에 따른 재정 악화를 우려한 이라크 총독 유수프 이븐 알핫자즈(Yusuf ibn al-Hajjaj, 재임 694-714)는 마왈리에게 비무슬림에게 부과되는 인두세인 지즈야(jizyah)를 그대로 내고 농촌으로 돌아갈 것을 명령하기도 했다(Agius 79)

 

750년 우마이야 칼리프조가 몰락하고 압바스 칼리프조가 성립된 뒤 마왈리에 대한 정치적, 경제적 차별은 경감되었고 특히 페르시아계 무슬림들이 관료 계층에 대거 진출하고 행정 분야에서 두각을 드러냈다. 그러나 사회적, 문화적 차원에서는 여전히 아랍인이 비아랍인보다 우월하다는 인식이 유지되었다. 무엇보다도 예언자 무함마드는 아랍인이었고, 코란은 아랍어로 쓰여 있지 않은가. 이와 같은 배경에서 슈우비야 운동은 페르시아인 관료와 지식인, 시인 등을 중심으로 페르시아인이 아랍인과 동등한 지위를, 때로는 페르시아의 유구한 역사와 문명을 근거로 아랍인에 대한 페르시아인의 우월한 지위를 주장하기 위해 나타난 일종의 문예 운동이었다.

 

한 예로 페르시아계 유대인 출신으로 아랍 부족의 계보를 연구한 아부 우바이다 마으마르 이븐 알무산나(Abu Ubadya Ma'mar ibn al-Muthanna)는 비아랍 문화가 이슬람 이전 아랍 문화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고 주장하며 아랍인들이 그렇게 중요하게 여기는 '순수한 아랍 부족'이라는 인식이 환상이라고 비판했다. 일부는 아랍어보다 페르시아어가 품격있고 아름다운 언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심지어는 아랍인을 개나 늑대에 비유하거나 페르시아의 뛰어난 문명에 비하면 야만인과 같은 존재로 조롱하고 비하하는 사례도 있었다(Agius 80-83). 대표적으로 이븐 압드 랍비히(Ibn Abd Rabbihi, 940년 사망)는 "아랍인들은 울부짖는 늑대, 어슬렁거리는 짐승이다. 그들은 끝없이 서로 싸우며 서로를 잡아먹는다."고 조롱했으며(Agius 81), 이스마일 이븐 야사르(Ismail ibn Yasar)라는 시인은 "우리(페르시아인)들이 딸을 키울 때 그들(아랍인)은 제 딸을 산채로 묻었구나!"고 이슬람 이전 아랍인들의 여아매장풍습을 비난한다(Savran 45)

 

카타르에서 발행한 알자히즈 우표

 

아랍인들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언어학자들은 아랍어가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언어이자 가장 풍부하고 다양한 표현을 지닌 언어라고 주장했다. 아랍 지식인들은 아랍인의 강인함, 관대함과 같은 뛰어난 자질과 덕성, 페르시아의 사치스럽고 화려한 문화와 아랍의 관대하면서도 검소한 문화, 페르시아의 억압적 계급제와 왕권과 아랍 부족들의 자유로움을 대비하여 아랍인의 뛰어남을 주장했다(Savran 46-49). 슈우비야 경향을 비판한 대표적인 아랍 문인인 알자히즈(Al-Jahiz)는 페르시아인의 인색함과 옹졸함을 조롱하고 아랍 문학의 세련됨과 우수성을 강조했다(Agius 84). 알자히즈에 따르면 슈우비야 운동은 곧 반(反)이슬람적 성향과도 관련되어 있다. "아랍어를 싫어하면 곧 아라비아반도를 싫어하게 된다....이렇게 되면 결국 이슬람을 저버리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이슬람은 아랍인이 가져왔고, 마땅히 따라야 하고 공경해야하는 선조들은 아랍인이기 때문이다." (Enderwitz, 514-515).

 

국내에도 번역된 알자히즈의 대표작 중 하나인 『수전노』

슈우비야에 비판적이었던 알자히즈답게 페르시아인의 인색함을 비웃는 이야기들도 실려있다. 

 

슈우비야 운동의 성격에 관해서는 다양한 의견이 있다. 디오니수스 아기우스(Dionisus Agius)는 무슬림으로서 동등한 위치를 요구하는 페르시아계 무슬림과 아랍인의 우월적 지위를 지키고자 하는 아랍 무슬림 사이의 긴장 관계가 수면 위로 드러난 것이 슈우비야 운동이라고 본다(Agius 80). 페리다 자와드(Ferida Jawad) 역시 슈우비야 운동을 이슬람권 고등 문화에서 아랍어와 아랍인의 지배적 위치에 대한 페르시아계 무슬림들이 의문과 반발이라고 설명한다(Jawad, 64). 로이 못타하데(Roy Mottahadeh)는 아랍 정복 이후 과거의 사회 엘리트로서 지배적 위치를 상실한 페르시아 지주계층과 아랍인으로부터 멸시를 받던 페르시아계 관료 계층 사이에서 성장한 페르시아의 문화, 문명, 역사의 우월성을 강조하는 시각이 슈우비야 운동으로 발전했따고 분석한다(Mottahadeh, 174-175).

 

한편 이그나츠 골드치어(Ignaz Goldziher)는 슈우비야 운동을 일종의 페르시아 민족주의 운동으로 이해했지만, 해밀턴 깁(Hamilton Gibb)은 골드치어의 주장이 민족주의가 성장한 19세기 상황을 8세기에 투영한다고 비판하며 슈우비야 운동이 아랍 무슬림 지배에 대한 페르시아인들의 저항과 독립 운동이 아니라 이슬람권 문명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둘러싼 논쟁이라고 주장한다. 깁에 따르면 슈우비야 운동은 이슬람권 문명이 페르시아 문화가 아랍-이슬람적 요소를 흡수해야 한다고 보는 경향과 페르시아 문화가 아랍-이슬람적 문화에 흡수되어야 한다고 보는 경향 사이의 논쟁이었다(Gibb, 66). 이에 따르면 슈우비야 운동을 주도한 페르시아인 관료 계층은 사산조 전통에 따라 이슬람권의 정치 및 사회 제도, 문화를 재편하고자 한 집단이었다. 스콧 사브란(Scott Savran) 또한 깁과 비슷하게 슈우비야 운동을 페르시아적 절대 왕권 전통과 도시 문화를 이슬람적 형태로 통합하고 이슬람권 문화를 페르시아 전통에 토대를 둔 형태로 재편하고자 한 운동이라고 본다(Savran, 42).

 

슈우비야 운동은 11세기 이후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진다. 원래 혈통과 무관하게 아랍어를 사용하는 모든 사람들은 아랍인이라는 인식이 확산되면서 페르시아인과 아랍인의 경계가 희미해졌고, 페르시아에서는 아랍인이 페르시아 문화로 동화되면서 양측의 구분 필요성이 약해졌다(Mottahadeh, 179-181). 이에 더해 압바스 칼리프의 권력이 약화되면서 이란 지역에는 페르시아계 준(準)독립 왕조가 들어섰으며, 이라크에서는 투르크계 군벌들이 권력을 잡았다. 동부 중동에서 페르시아 문화를 수용한 투르크인들이 부상함에 따라 아랍인의 문화적, 정치적 중요성이 감소했다. 언어적 차원에서는 아랍어는 종교와 법률의 언어로, 페르시아어는 문학과 고등 문화의 언어로 일종의 기능적 분화가 이루어졌다. 이에 더해 아랍인과 페르시아인 사이 문화적, 사회적 우위를 둘러싼 경쟁은 무슬림 사회 질서가 정치적 지배권을 행사하는 투르크계 군사 엘리트와 사회적, 종교적 영향력을 행사하며 피지배 계층을 대변하는 울라마로 분화되면서 의미를 상실했다(Jawad 72-73). 아랍인과 페르시아인은 이제 서로 다른 역할을 맡았고, 어차피 두 집단 모두 투르크계 군사 엘리트의 피지배인이 되어 버린 마당에 서로 주도권 다툼을 벌이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이처럼 초기 압바스 시대 동부 중동에서 치열하게 전개되던 슈우비야 논쟁은 중동 사회와 정치적 구도가 변화하면서 종결되었고, 지나간 역사가 되었다. 그러나 역사책에서나 언급되던 슈우비야라는 개념은 20세기에 다시 부활해 망령처럼 중동을 떠돌기 시작했다.  


참고문헌

Agius, Dionisus A. "The Shu‘ubiyya Movement and Its Literary Manifestation." Islamic Quarterly 24, no. 3 (1980): 76-88.

Enderwitz, Susanne. "Al-Shu‘ūbiyya." In The Encyclopaedia of Islam, 2nd edition, 513-515.

Gibb, Hamilton A. R. "The Social Significance of the Shuubiya." In Studies on the Civilization of Islam, edited by Stanford J. Shaw and William R. Polk, 62-73. Princeton: Princeton University Press, 1982[1953].

Jawad, Ferida. "The Triumph of Arabism: The Shu‘ūbiyyah Controversy and the National Identity of Modern Iraq." Jusūr 13 (1997): 53-87.

Mottahedeh, Roy P. "The Shu‘ubiyah Controversy and the Social History of Early Islamic Iran." International Journal of Middle East Studies 7, no. 2 (1976): 161-182.

Savran, Scott. "Cultural Polemics in the Early Islamic World: The Shu‘ubiyya Controversy." Journal for the Study of Peace and Conflict (2007-2008): 4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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