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군의 예루살렘 점령
에밀 시뇰(Émile Signol), 1847년 작
출처: https://en.wikipedia.org/wiki/Siege_of_Jerusalem_(1099)
흔히 예루살렘은 메카와 메디나에 이어 이슬람의 3대 성지라고 말한다. 그리고 1099년 십자군의 예루살렘 점령은 7세기 아랍인들이 정복한 이후 처음으로 예루살렘이 '이교도'의 손에 넘어간 사건이었다. 이 뿐만 아니라 무슬림 역사가인 이븐 알아시르(Ibn al-Athir, 1233년 사망)에 따르면 십자군은 무려 7만 명이나 되는 시민을 살해하고 성스러운 알아크사 모스크(Al-Aqsa Mosque)와 바위의 돔을 약탈하고 더럽혔다. 그렇다면 당대 무슬림들에게 십자군의 예루살렘 점령은 메카나 메디나가 비무슬림에 의해 점령된 것에 비견할 수 있는 충격이 아니었을까.
아민 말루프의 『아랍인의 눈으로 본 십자군 전쟁』은 국내에 소개된 십자군 관련 도서 중 유일하게 아랍 무슬림 사료를 바탕으로 십자군 전쟁의 역사를 다룬 책으로, 이븐 알아시르라는 이름과 그가 바라본 십자군 전쟁을 국내에 소개한 최초이자 유일한 책이다. 다마스쿠스의 법관이었던 아부 사으드 알하라위(Abu Sa'd al-Harawi)가 1차 십자군의 침공과 예루살렘 함락 이후 바그다드로 가 무슬림들의 대응을 호소했던 일에 대해 말루프는 이븐 알아시르의 기록을 토대로 다음과 같이 극적으로 서술한다:
"당신들은 금식을 어긴 것에 이처럼 분노하면서 수만의 무슬림들이 학살당하고 이슬람의 성지가 파괴되는 모습은 그리도 태연하게 놓아둘 수 있냐고. 군중이 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지자 그는 자신이 '빌라드 알 샴' 즉 시리아 땅에서 당한 재난과 예루살렘을 치러 온 이들에 대해 상세히 말했다. 피난민들은 눈물을 흘렸다. 그 눈물은 곧 다른 사람들의 눈물을 자아냈다. 이븐 알 아시르는 적고 있다.
자리를 떠난 알 하라위는 이번에는 궁정에서 한바탕 소동을 일으켰다. "내가 보기에 당신들은 연약하기 짝이 없소. 그러고도 신앙의 수호자라니!" 그는 신도들의 왕자인 스물두 살의 젊은 칼리프 알무스타지르 빌라의 디완에 들어서자마자 대뜸 소리쳤다."
아민 말루프, 『아랍인의 눈으로 본 십자군 전쟁』, 김미선 옮김, 서울: 아침이슬, 2004, 90쪽.
예루살렘 함락 이후 무슬림에게 지하드에 나설 것을 촉구한 가장 대표적인 인물은 다마스쿠스의 설교자이자 십자군 침공을 기독교도의 '지하드'라고 부르며 무슬림에 대한 기독교도의 전방위적 공격의 일환으로 이해한 알리 이븐 타히르 알술라미(Ali ibn Tahir al-Sulami)다. 알술라미가 남긴 설교를 모은 지하드의 책(Kitab al-Jihad)에서 예루살렘은 총 10번, 단순한 지리 관련 언급을 제외하면 총 8번 언급될 뿐이지만, 그의 세계관에서 예루살렘은 무슬림 종말론의 핵심에 있는 곳이자 기독교도에 맞서 궁극적으로 승리할 지하드의 교두보가 되는 곳이었으며, 따라서 무슬림이 지하드를 통해 반드시 되찾아야 할 곳이었다(Christie 2007, 209-221). 한편 이라크 시인 이븐 알아비와르디(Ibn al-Abiwardi, 1113년 사망)는 "잠든 자마저도 깨울 재앙의 시간에 어찌 잠들 수 있겠는가? 시리아의 형제들은 낙타 등과 시체를 파먹는 독수리의 배 속에서 자고 있는데?"고 노래하며 시리아와 예루살렘의 운명에 무관심한 이라크 무슬림들을 비난하며 행동을 촉구했다(Irwin , 224).
하지만 이슬람의 성도(聖都)가 비무슬림의 손에 넘어갔음에도 많은 무슬림들의 반응은 미온적이었고 굼떴다. 알하라위와 알술라미, 이븐 알아비와르디의 피맺힌 호소에도 불구하고 바그다드의 압바스 칼리프와 이집트의 파티마 칼리프 모두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고, 셀주크 군주들은 서로 싸우기에 바빴다. 예루살렘을 탈환해야 한다는 지하드(jihad)의 호소는 약 40년이 지난 뒤인 1140년대 이마드 알딘 장기(Imad al-Din Zangi)와 그의 후계자 누르 알딘(Nur al-Din), 그리고 살라흐 알딘(Salah al-Din) 또는 살라딘(Saladin)이 등장할 때까지 큰 호응을 불러 일으키지 못했다. 특히 십자군이 침공하던 시기 예루살렘은 파티마 칼리프조의 영토였지만, 칼리프를 제치고 실권을 휘두르고 있던 알아프달(Al-Afdal)은 지하드를 선포하는 등 예루살렘을 되찾기 위한 적극적인 움직임을 보여주지 않았다.
윌리엄 햄블린(William Hamblin)에 따르면 알아프달이 지하드와 예루살렘 탈환에 큰 열의를 보여주지 않은 데에는 여러 이유가 있다. 먼저 지하드를 선포하면 '신도들의 지휘관'으로서 칼리프의 권위가 강화될 수도 있고, 이는 꼭두각시 칼리프를 내세워 실권을 장악한 알아프달에게는 그리 바라던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지하드는 알아프달의 권력 기반이자 파티마 군대 대부분을 차지한 기독교도 아르메니아 병사들에게는 아무 의미도 없었고, 오히려 무슬림 병사들 사이에서 아르메니아인에 대한 반감을 키울 위협도 있었다. 결론적으로 알아프달은 십자군을 파티마조에 대한 중대한 위협으로 여기지 않았고, 오히려 십자군 왕국이 다마스쿠스의 셀주크 군주들과 파티마조 사이에서 완충 역할을 해 줄 것을 기대했다(Hamblin 2011, 32-35).
메카와 메디나가 비무슬림의 손에 넘어갔어도 무슬림들이 이렇게 무관심했을까?
그렇다면 11세기 후반과 12세기 초반에는 예루살렘이 이슬람(그리고 팔레스타인)의 성지로서 확고부동한 위치를 차지하는 오늘날과는 다른 시각이 존재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이를 확인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당대 무슬림들이 남긴 기록, 특히 예루살렘 함락에 관한 동시대 기록을 살펴보는 것이다.
먼저 오늘날의 일반적인 인식과는 다르게, 십자군 전쟁 이전 무슬림들은 예루살렘에 큰 관심이나 중요성을 부여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있다. 이를 뒷받침하는 증거 중 하나는 예루살렘의 특별하고 신성한 위치를 강조하는 '파다일 알쿠드스(fada'il al-quds)'라는 문학 장르의 변화다. 술레이만 무라드(Suleiman Mourad)에 따르면, 십자군 전쟁 이전에 파다일 알쿠드스에 속하는 작품을 집필한 학자들은 거의 대부분이 예루살렘 인근에 살던 현지 학자들이었고 작품들이 통용되던 지역 역시 예루살렘 인근 지역에 국한되었다. 이처럼 십자군 전쟁 이전에는 이슬람권 다른 지역에서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던 파다일 알쿠드스 장르는 살라딘의 시대에 이르러서야 이슬람권 각지에서 널리 읽히기 시작했다(Mourad 2010[2014], 4-5).
콘라드 히르쉴러(Konrad Hirschler)는 동시대 무슬림들이 예루살렘 함락을 이해한 방식에 관해 뛰어난 연구를 남겼다. 히르쉴러의 연구는 안상준의 논문 「1099년 7월 15일 십자군의 예루살렘 정복 - 십자군과 예루살렘에 관한 무슬림의 인식 -」을 통해 국내에 소개되었다(개인적으로는 히르쉴러의 논문을 다 읽은 뒤 이 글을 쓰기 직전에야 안상준의 논문을 접했다). 하지만 해외 논문이든 국내 논문이든 대학 제도 바깥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그들만의 글일 뿐이니, 여기서 간략하게 히르쉴러의 연구를 소개해보며 무슬림들이 예루살렘 함락을 어떻게 인식했는지를 소개해본다.
먼저 히르쉴러는 예루살렘 함락과 그리 멀지 않은 시대에 살았던 시리아의 무슬림 저자들이 예루살렘 함락을 매우 무미건조하게 서술하는 점에 주목한다. 시리아 알레포의 역사가 알아지미(Al-Azimi, 1161년 이후 사망)는 예루살렘 함락을 다음과 같이 전한다:
"이후 프랑크인들이 예루살렘을 이집트인의 손에서 빼앗았다. 고드프리는 예루살렘을 차지하고 시나고그를 불태웠다." (Hirschler 2014, 42)
이븐 알칼라니시(Ibn al-Qalanisi, 1160년 사망)의 설명은 알아지미보다 구체적이지만 역시 무미건조한 것은 매한가지다:
"프랑크 인이 도시를 공격하고 장악했다. 주민 일부가 다비드 탑으로 피신했고 다수가 살해되었다. 그들은 유대인을 유대인 교당으로 몰아넣은 뒤 불을 질렀다. 7월 14일에 그들은 다비드 탑을 장악했다. 성유물함과 아브람의 묘를 파괴했다." (Hirschler, 42; 안상준, 235)
이븐 알아즈라크 알파리키(Ibn al-Azraqi al-Fariqi, 1176-1177년 사망)는 한술 더 뜬다:
"이슬람력 491년 프랑크인들이 나타났다. 그들은 안티오크와 트리폴리를 공격해 차지했다. 492년에는 예루살렘과 인근의 티레와 아크레를 점령했다. 498년에는 남은 해안 지역을 점령하고 더욱 강성해졌다. 이어 프랑크인들은 에데사와 인근에 있는 유프라테스강에 접한 성채들을 점령했다." (Hirschler, 43)
이처럼 예루살렘 무슬림들이 겪은 참사와 비극을 열렬한 감정을 담아 묘사한 13세기 이븐 알아시르와 달리, 그보다 앞선 12세기 시리아 역사가들이 전하는 예루살렘 함락은 담담하고 무미건조하다. 우사마 이븐 문키드(Usama ibn Munqidh, 1188년 사망)는 아예 예루살렘 함락에 대해 언급도 하지 않는다(Hirschler, 44). 그들은 이슬람 성소의 약탈과 유린, 7만 명에 달하는 대규모 학살에 관해 거의 언급하지 않는다. 알아지미와 알파리키에게 예루살렘은 그저 프랑크인의 침공에서 함락된 수많은 도시들 중 하나였을 뿐이다. 이븐 알칼라니시의 서술은 다른 둘보다 자세하고 학살에 대한 이야기도 전하지만, 7만 명이 살해되었다거나 알아크사 모스크 등이 약탈되었다는 말은 하지 않는다. 시리아 역사가들의 기록에서는 예루살렘을 성지로 바라보는 인식, 신실한 무슬림들의 죽음, 무슬림 성소에 대한 약탈, 이슬람에 대한 기독교도의 위협과 적의와 같이 히르쉴러가 '이슬람적 주제'라고 부르는 주제는 나타나지 않는다. 무엇보다도 세 명의 저자 모두 종교적 함의를 지닌 '십자군'이라는 표현 대신 '프랑크인'이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그들이 보기에 예루살렘 함락은 큰 중요성도 가지고 있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이슬람에 대한 기독교의 공격과 위협도 아니었다. 그저 '프랑크인'이라 불리는 집단과 이집트인 사이의 갈등이라는 평범한 사건이었던 것이다.
한편 이집트 역사가들은 시리아 역사가들보다는 자세하게 예루살렘 함락을 묘사한다. 이븐 알아라비(Ibn al-Arabi, 1148년 사망)는 안달루스(오늘날의 스페인) 출신이지만 오랫동안 이집트에도 머물렀고 이슬람권의 동부 지역을 여행하기도 했다. 아래는 이븐 알아라비가 묘사하는 예루살렘 함락이다:
"운명은 남쪽과 북쪽에서 불어오는 시리아와 이라크를 덮쳤다. 시리아는 버려진 과거가 되었고 이슬람의 경전은 악사 모스크에서 사라져버렸다. 샤으반달 18일(7월 10일) 금요일 아침에 3,000명이 살해되었다. 남녀 가리지 않고 경건한 예배자들이 무수히 희생되었고, 그중에는 유명한 수도승과 명성이 자자한 경건자들이 있었다....(셀주크 술탄) 말릭샤의 여러 아들이 정쟁에 휘말리니 비잔티움인들은 시리아를 공격하여 이슬람의 제3의 성지를 차지했다." (Hirschler, 49; 안상준, 247)
예루살렘에 큰 중요성을 부여하지 않는 시리아 역사가들과 달리 이븐 알아라비는 예루살렘을 '이슬람의 세 번째 성지'로 칭하며 무슬림들에게 예루살렘이 가진 종교적 의미를 강조한다. 예루살렘 함락을 종교적 측면에서 이해하는 이븐 알아라비의 시각은 살해당한 이들이 신실한 무슬림이었음을 강조하는 부분에서도 나타난다. 그 수가 3,000명에 달했다는 세부적인 정보 또한 이븐 알아라비가 최초로 제시한다.
하지만 이러한 '이슬람적 주제'에도 불구하고, 이븐 알아라비 또한 예루살렘 함락을 기독교도와 무슬림 사이의 맥락에서 이해하지 않는다. 예루살렘 함락은 '십자군'이 아닌 비잔티움 제국과 투르크 사이의 대립이었고, 셀주크인들이 분열되어 있었기 때문에 발생한 사건이었다. 마찬가지로 이집트 콥트교도 학자였던 이븐 알쿨주미(Ibn al-Qulzumi, 1127년 사망) 또한 침략자를 십자군이 아닌 비잔틴인으로 칭한다(Hirschler, 51-52). 한편 이븐 알쿨주미 역시 콥트 기독교도였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서술에서는 십자군의 예루살렘 점령이 이슬람에 대한 기독교의 승리라고 보는 관점이 나타나지 않는다. 시리아와 달리 이집트에서는 예루살렘 함락을 1차 십자군 전쟁의 결정적인 사건으로 이해하고 예루살렘의 종교적 의미를 더욱 강조하는 서술이 나타났지만, 이슬람과 기독교 사이의 종교 전쟁이라는 서사는 이집트 측 기록에서도 나타나지 않는다(Hirschler, 52).
예루살렘 함락에 대한 세부 사실 또한 기록자마다 차이를 보인다. 이븐 알아라비와 이븐 알칼라니시는 이슬람력 샤으반 달에 예루살렘이 함락되었다고 전하는 반면, 이븐 알쿨주미는 라마단 달에 함락되었다고 말한다. 이븐 알아라비에 따르면 예루살렘은 아침에 함락되었지만, 이븐 알칼라니시는 저녁에 함락되었다고 말한다. 누가 학살을 당했는지도 시리아 측과 이집트 측 기록이 서로 다르다. 알아지미는 유대인들이, 이븐 알칼라니시는 유대인과 무슬림들이, 이븐 알아라비는 무슬림들이 학살당했다고 전한다(Hirschler, 54).
'이슬람적 주제'가 더욱 발전한 지역은 역설적으로 십자군의 직접적인 영향을 받지 않은 이라크였다. 바그다드의 학자이자 설교사인 알자우지(Al-Jawzi, 1200년 사망)가 남긴 연대기에서는 히르쉴러가 '이슬람적 주제'라고 부른 요소들이 분명히 나타난다:
"샤으반 달 13일(7월 5일) 금요일에 프랑크인이 예루살렘을 장악하고 7만 명이 넘는 무슬림을 살해했다. 프랑크인은 바위의 돔으로부터 매우 값비싼 등잔과 램프를 떼어냈다. 시리아에서 탈출한 피난민들이 무슬림에게 일어난 일을 보고했다. 다마스쿠스 재판관 아부 사드 알-하라위가 정부 관리에게 호소하니 참석자들이 눈물을 흘렸다. 참석자 중 한 명이 군대에 파견되어 참 상을 알렸으나 아무런 조치가 없었다.” (Hirschler, 49; 안상준, 249)
알자우지의 묘사는 위에서 본 시리아 학자들의 서술과는 확연하게 차이를 보인다. 시리아 학자들이 '이집트인'이라고 부른 것과 달리 학살된 사람들은 '무슬림'이라고 분명히 명시되며 학살자가 7만 명이라는 구체적이면서 엄청난 수치도 제시된다. 더 이상 유대인은 언급되지 않는다. 이븐 알아시르가 전한 다마스쿠스 법관의 호소 또한 알자우지가 처음 언급한 내용이다. 시리아 학자들이 예루살렘 함락을 지나가는 사건으로 묘사했다면, 알자우지는 예루살렘 함락을 이슬람력 492년에 일어난 일 중 가장 중요한 일로 묘사한다(Hirschler, 55). 알자우지의 서술은 그보다 한 세대 뒤에 살았던 이븐 알아시르에 의해 우리에게 전해지고, 예루살렘 함락에 대해 무슬림들이 보여준 가장 '일반적'인 반응으로 여겨지게 되었다.
예루살렘 함락에 대한 무슬림들의 반응은 이처럼 복잡했다. 알술라미, 알자우지, 이븐 알아비와르디, 이븐 아라비처럼 12세기 초에도 예루살렘을 확고부동한 이슬람의 제3의 성지로 인식하고 예루살렘 함락을 충격과 비판, 공포와 분노로 맞이한 사람들이 있었던 반면, 시리아 시인 이븐 알카이야트(Ibn al-Khayyat, 1123/1124년 사망)와 같은 사람들은 십자군의 목표가 무슬림을 파괴하기 위한 것이라고 주장하면서도 예루살렘 함락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는다(Christie 2006, 62; Hirschler, 57). 살라딘의 전기 작가 이마드 알딘 알이스파하니(Imad al-Din al-Isfahani, 1201년 사망)은 살라딘의 예루살렘 탈환을 찬양하면서도 정작 십자군이 예루살렘을 점령한 사건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Hirschler, 67).
이와 같은 근거를 토대로 히르쉴러는 예루살렘 함락이 사건을 직접적으로 경험한 시리아 그리고 이집트 무슬림 대부분에게는 - 물론 알술라미와 같은 예외도 있지만 - 큰 충격과 공포, 감정적 반응을 일으키는 사건이 아니었을 가능성을 제시한다. 이라크 학자들 그리고 유럽 역사가들이 말하는 바와 같은 '피가 무릎까지 찰 정도'의 대규모 학살이 있었을지 역시 당사자라고 할 수 있는 또한 이집트와 시리아 학자들의 기록에 비추어 본다면 지나치게 과정된 서술일 가능성이 크다(Hirschler, 76).
역사적 사건은 존재한다. 누구도 1099년 십자군이 예루살렘을 점령했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다만 달라지는 것은 역사적 사건을 이해하고 의미를 부여하는 관점이다. 어떤 사건에 대한 특정한 관점과 해석이 오늘날 당연하고 널리 받아들여진다고 해서 과거에도 그랬으리라고 섣부르게 판단할 수는 없다. 동시대 무슬림들도 예루살렘 함락을 서로 다른 시각으로 이해했다. 누군가는 무슬림에 대한 기독교도의 전면적인 선전포고로, 누군가는 단순한 외부인의 침공으로 이해했다. 오늘날 무슬림, 특히 팔레스타인인들이 예루살렘에 부여하는 의미 또한 오랜 역사를 거쳐 구성된 산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무슬림뿐만 아니라 유대인들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참고문헌
안상준. 「1099년 7월 15일 십자군의 예루살렘 정복 - 십자군과 예루살렘에 관한 무슬림의 인식 -」, 역사와 세계 55권 (2019): 231-262.
Christie, Niall. “Religious Campaign or War of Conquest? Muslim Views of the Motives of the First Crusade.” In Noble Ideals and Bloody Realities, edited by Neil Christie and Maya Yazigi, 57-74. Leiden: Brill, 2006.
Christie, Niall. "Jerusalem in the Kitab Al-Jihad of ʿAli ibn Tahir Al-Sulami." Medieval Encounters 13 (2007): 209-221.
Hamblin, William. "To Wage Jihād or not: Fatimid Egypt During the Early Crusades." In The Jihād and its Times, ed. Hadia Dajani-Shakeel and Ronald A. Messier, 31-39. Ann Arbor: University of Michigan Library Publishing, 2011.
Hirschler, Konrad. "The Jerusalem Conquest of 492/1099 in the Medieval Arabic Historiography of the Crusade: From Regional Plurality to Islamic Narrative." Crusades 13 (2014): 37-76.
Irwin, Robert. "Islam and the Crusades, 1096-1699.” In The Oxford Illustrated History of the Crusades, edited by Jonathan Riley-Smith, 217-259.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1997.
Mourad, Suleiman. "Did the Crusades Change Jerusalem’s Religious Symbolism in Islam?" Al-ʿUṣūr al-Wusṭā – The Bulletin of Middle East Medievalists 22, no. 1&2 (2010) [2014]: 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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