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븐 바투타의 『여행기』 필사본, 카이로, 1836년
출처: en.wikipedia.org/wiki/The_Rihla
1. 이븐 바투타, 축지법과 순간이동능력의 보유자?
이븐 바투타는 북아프리카에서 중국, 중앙아시아, 발칸 반도, 러시아 초원, 동아프리카와 서아프리카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지역을 여행하며 직접 경험하고 들은 바를 『여행기』라는 이름의 기록으로 남겼다. 그러나 현존하는 『여행기』가 이븐 바투타가 직접 쓴 기록은 아니다. 이븐 바투타의 고향인 탕헤르를 통치하던 마린 조의 술탄 아부 아난 파리스(Abu Anan Faris, 재위 1348-1358년)는 시인이자 문장가였던 이븐 주자이(Ibn Juzayy)에게 이븐 바투타의 여행담을 기록으로 옮길 것을 명했고, 그의 집필과 편집 과정을 거쳐 오늘날 우리가 읽는 『여행기』가 완성되었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여행기』는 이븐 바투타와 이븐 주자이 두 사람의 '공동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두 사람이 정확히 어떤 과정을 거쳐 『여행기』를 집필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이븐 주자이는 이븐 바투타가 여행 도중에 남긴 일기나 기록을 토대로 집필했을까? 아니면 이븐 바투타의 기억에 의존해 그의 구술을 토대로 작업했을까?
이븐 바투타가 여행 도중에 일기나 기록을 남겼는지 여부는 불확실하며, 설령 그랬다 하더라도 30년에 가까운 여행 기간에 걸쳐 기록한 모든 내용을 완전히 보관하고 있었으리라는 보장도 없다. 30년에 걸쳐 매일 여행에 관한 기록을 남겼다면 그 분량은 어마어마했을 것이다. 노트북도 핸드폰도 USB도 외장하드도 없던 시절에 그 방대한 기록을 한 개인이 다 짊어지고 다니는 것이 가능할까? 이븐 바투타가 기록을 남겼다 하더라도, 그는 여행 도중에 해적을 만나거나 폭풍우로 배가 조난되는 등 수많은 위기를 겪었으며 이 과정에서 일부 기록은 잃어버렸을 가능성이 크다. 그렇다면 이븐 주자이는 많은 부분에서 이븐 바투타의 기억과 구술에 의존해서 작업하지 않았을까?
『여행기』가 이븐 바투타의 기억에 크게 의존해 작업되었다면 문제는 더욱 복잡해진다. 이븐 바투타는 1325년 출발해 1354년에 여행을 끝마치고 귀국했다. 과연 한 사람이 약 30년 전에 겪었던 경험이나 사건을 얼마나 정확하게 기억할 수 있겠는가? 무슨 도시를 몇 월 며칠에 방문했으며 그 도시에서 누구를 만났는지 완벽히 기억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방문했던 도시가 한두 곳도 아닌 수십 수백개에 달한다면 한 사람이 어떻게 그 모든 경험을 다 일일이 기억할 수 있겠는가? 이븐 바투타는 무엇이든 한 번 보기만 하면 절대 잊어버리지 않는다는 완전기억능력 보유자가 아니었으며, 실제로 『여행기』 많은 부분에서 그는 '어느 지역에서 누구를 만났는데 그 사람의 이름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고백한다. 하지만 이름 외에도 여행 경로와 일정, 여행지에서 그가 보고 들은 내용에서도 기억의 착오나 혼란, 오류가 있었을 가능성 또한 존재한다. 또한 이븐 바투타의 기억과 구술에만 의존해 작업할 수밖에 없었던 이븐 주자이에게 오류나 착오를 교정할 수 있는 마땅한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집필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나타났을 위와 같은 문제를 고려해보면 『여행기』에서 많은 오류가 나타난다는 점은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니다. 특히 기억 착오가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여행 일정에서 많은 오류가 나타나며, 깁(H. R. A. Gibb)은 "이븐 바투타가 제시한 여행 일정은 분명히 불가능하다"고 지적할 정도다(Gibb, 528). 『여행기』에 나타난 일정을 그대로 믿으면 이븐 바투타는 매우 먼 거리를 짧은 시간에 주파하는 초인적인 능력을 가졌거나 한 지점에서 다른 지점을 연결하는 최단 경로가 아닌 멀리 돌아가는 경로를 택하는 매우 이상한 여행을 했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한 예로 이븐 바투타는 1326년 7월(이슬람력 726년 8월) 중순에 카이로를 출발해 1326년 8월 9일(이슬람력 726년 9월 9일)에 다마스쿠스에 도착했다고 기록한다(이븐 바투타, 1권, 92; 135). 이 정도 거리는 보통 3주가 걸렸다는 점을 생각할 때 이븐 바투타의 여정에는 별 이상한 점이 없어 보인다. 그러나 문제는 그가 다마스쿠스로 바로 간 것이 아니라 갑자기 북쪽으로 길을 틀어 시리아 각지를 순회했다는 것이다. 데이비드 웨인스(Daivd Waines)가 지적하듯이 이븐 바투타는 3주라는 시간 내에 카이로에서 시리아까지 도착했을 뿐만 아니라 시리아 북부의 안타키야와 알레포까지 돌며 "시리아의 전역을 여행하는 불가능한 일을 해냈다"(웨인스, 26).
이븐 바투타의 '축지법'은 아나톨리아의 여정에 관한 서술에서도 나타난다. 그는 1331년 7월(이슬람력 731년 9월)을 오늘날 아나톨리아 서부의 아크리두르(Akridur, 오늘날 터키의 에으리디르Eğridir)에서 보낸 뒤 서쪽으로 여행을 계속해 지중해에 접한 밀라스(Milas)에 다다랐다고 설명한다(이븐 바투타, 1권 417-424). 그러다 갑자기 그는 동쪽으로 방향을 틀어 콘야(Konya), 시바스(Sivas)를 지나 아나톨리아 동부로 향해 에르진잔(Erzincan)과 에르주룸(Erzurum)을 방문한다(앞의 책 425-432). 그러고는 갑자기 다시 아나톨리아 서부의 비르기(Birgi)로 향해 그 곳에서 "몹시 무더운 때"를, 즉 여름을 보냈다(앞의 책, 432-434). 밀라스에서 비르기 사이의 거리는 약 100km에 불과하지만, 밀라스와 비르기에서 에르주룸까지는 약 1,400km가 떨어져 있다. 이븐 바투타는 밀라스에서 출발해 북쪽으로 약 100km 떨어진 비르기에 가기 위해 2,800km를 우회한 것이고, 그것도 7월에 출발해 여름이 다 가기도 전에 그 먼 거리를 주파한 것이다. 이 여정이 과연 가능한 것일까? 여러분이 아나톨리아 반도를 여행하고 있다면, 그리 멀지 않는 곳에 있는 마을을 가기 위해 총 2,800km를 돌아서 가겠는가?
이븐 바투타의 아나톨리아와 흑해 연안 여정
아나톨리아 서부 해안지역을 따라가던 이븐 바투타는
밀라스에서 갑자기 동쪽으로 이동해 에르주룸까지 가서 다시 서쪽의 비르기로 돌아온다.
시대, 문화, 언어, 종교의 차이를 떠나서 이렇게 여행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출처:Ross E Dunn, The Adventures of Ibn Battuta: A Muslim Traveler of the Fourteenth Century, 138.
축지법을 넘어 이븐 바투타는 분신술을 쓰기도 한다. 그는 이슬람력 734년 1월, 즉 1333년 9월에 인도 북부의 펀잡 지역에 도착했다고 말한다(이븐 바투타, 2권 13). 하지만 동시에 그는 이슬람력 734년 새해를 아나톨리아의 부르사(Bursa)에서 보냈다고 언급한다(이븐 바투타, 1권 443-444). 이븐 바투타는 이슬람력 734년의 새해를 대체 어디에서 보냈던 것일까? 그는 대체 어디에서 실수를 한 것일까? 교차 검증에 필요한 다른 외적 증거가 없는 한, 『여행기』만으로는 이 질문에 답을 얻을 수 없다.
이븐 바투타도 사람이었으니만큼 여행 일정이야 기억의 착오로 인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다. 시리아나 아나톨리아 여행담에서 나타난 거리나 시간 상의 오류는 훗날 회상하는 과정에서 서로 다른 시기에 여행했던 기억이 서로 합쳐진 것일 수도 있다(웨인스, 26; Gibb, 533-535). 이러한 이유로 깁과 이반 흐르벡(Ivan Hrbek)은 실제 물리적 거리와 여행 시간, 다른 사건과의 교차 검증을 통해 이븐 바투타의 여행 일정에 대한 '교정'을 시도하기도 했다(Gibb, 528-537; Hrbek, 409-486). 따라서 여행 일정의 오류 그 자체는 『여행기』가 가진 신뢰성과 사료적 가치를 크게 훼손하지 않으며, 이븐 바투타가 거짓을 지어냈다는 근거가 될 수 없다. 그러나 『여행기』의 신뢰성에 의문을 들게 만드는 더욱더 큰 문제가 있다. 바로 '표절'과 '창작'이다.
2. 표절의 문제
이븐 바투타가 여행의 경험을 기록으로 남긴 유일한 무슬림 여행자는 아니었다. 대표적으로 이븐 바투타보다 약 150년 전에 활동한 안달루시아 출신의 이븐 주바이르(Ibn Jubayr, 1145-1217) 또한 스페인에서 출발해 북아프리카와 이집트, 성지 메카와 메디나, 시리아 지역을 여행하고 그의 경험을 기록으로 남겼다.
이븐 바투타(또는 이븐 주자이)는 『여행기』의 여러 부분에서 이븐 주바이르의 여행기를 인용하고 있다. 다마스쿠스와 알레포에 관해 그는 "아부 후싸인 븐 주바이르는 할라브에 관해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이븐 바투타, 1권 115) "다마스쿠스에 관한 묘사로는 아불 하싼 이븐 주바이르 - 알라께서 그에게 자비를 - 가 말한 것이 가장 그럴 듯하다"(앞의 책, 135)라고 언급하며 이븐 주바이르의 서술을 길게 인용한다(정수일의 번역본에서는 이븐 주바이르의 이름이 일관되게 표기되지 않았다).
하지만 존 매턱(John Mattock)은 이븐 주바이르를 인용했다고 명시한 부분 외에도 이븐 바투타(또는 이븐 주자이)가 메카, 메디나, 이라크의 쿠파와 바그다드, 아나톨리아 동부의 누사이빈(Nusaybin)과 마르딘(Mardin)을 설명하는 부분에서 이븐 주바이르의 기록을 상당 부분 인용했다고 지적한다(웨인스, 36). 매턱에 따르면 "이븐 바투타의 『여행기』에서 250쪽에 해당하는 분량, 즉 전체의 1/7은 이븐 주바이르의 기록을 그대로 인용한 부분이다" (Mattock, 211, Elad, 269에서 재인용). 이를 근거로 매턱은 시리아와 이라크 북부, 히자즈(Hijaz)에 관한 이븐 바투타의 서술 상당 부분이 그가 살던 당대의 상황이 아닌 '최신 정보'로 갱신되지 않은 12세기 이븐 주바이르 시대의 정보를 담고 있다고 주장한다(웨인스, 37).
이븐 바투타(또는 이븐 주자이)가 참고 또는 '표절'한 앞세대의 여행가는 이븐 주바이르만이 아니다. 아미캄 엘라드(Amikam Elad)는 『여행기』에 나타나는 카이로, 알렉산드리아 등대, 팔레스타인에 관한 서술이 1289년에 이 지역을 여행한 무함마드 이븐 무함마드 알아브다리(Muhammad ibn Muhammad al-Abdari)의 기록을 상당 부분 인용 - 또는 표절 - 했다고 지적한다(Elad, 261-266). 엘라드는 또한 위에서 살펴본 이븐 바투타의 혼란스럽고 불가능한 여행 일정이 기억의 착오가 아닌 알아브다리의 기록을 옮기는 과정에서 발생했을 가능성도 제시한다(앞의 글, 266).
예루살렘의 알아크사 모스크 전경
출처: en.wikipedia.org/wiki/The_Rihla
인용 또는 '표절' 과정에서 이븐 바투타(또는 이븐 주자이)는 실수를 저지르기도 했다. 예루살렘의 알아크사 모스크(Al-Aqsa Mosque)의 면적에 대해 이븐 바투타는 "동서의 길이는 752말리키야 완척(腕尺)이며 끼블라로부터 정중앙까지의 너비는 453말리키야 완척"(이븐 바투타, 1권 102)이라고 설명하지만, 알아브다리는 "남북의 너비가 752완척, 동서의 길이가 453완척"이라고 말한다(Elad, 265). 즉 이븐 바투타(또는 이븐 주자이)는 알아브다리의 설명을 반대로 옮겨놨다. 이에 대해 엘라드는 다음과 같은 의문을 던진다: "이븐 바투타가 정말 예루살렘에 있었을까? 그가 정말 알아크사 사원이 있는 성전산에 올라갔을까? 만약 그랬다면, 어떻게 길이와 너비에 대해 실수할 수 있을까?"(앞의 글, 265)
3. 이븐 바투타는 정말 정신이 나간 이븐 타이미야를 봤을까?
위에 언급했듯이 이븐 바투타는 1326년 8월 초(이슬람력 726년 9월)에 다마스쿠스를 방문했다고 말한다. 다마스쿠스에서 그는 한발리파의 유명한 법학자인 이븐 타이미야(Ibn Taymiyyah, 1263-1328)가 일으킨 소란에 대해 아래와 같이 전한다:
"마침 내가 다마스쿠스에 있을 때다(wa kuntu idh dhāka bi-dimashq). 나는 금요예배시 그를 만났다. 그는 사원의 강단에서 지금 막 사람들을 효유하고 계도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그는 "알라께서 이 속세의 하늘에서 내려오고 계신다. 바로 내가 이렇게 내려가는 것처럼(inna allāha yanzilu ilā samā'i al-dunyā ka-nuzūlī)"이라고 말하고는 강단의 계단 하나를 내려서는 것이었다. 이에 이븐 자히라라는 한 말리키야파의 법학자가 불쑥 일어서서 항의하면서 그의 말을 대뜸 부정하고 나섰다. 그러나 청중들이 이 법학자에게 달려들어 주먹과 신발창으로 몰매를 안겨 터번까지 벗겨졌다. 그런데 벗겨진 터번 밑으로 하르르한 비단천 받침수건이 나타나자 사람들은 일제히 흥분하여 그의 이러한 옷차림새를 크게 나무랐다.....이러한 공식문건이 나쉬르왕에게 보내지자, 그는 이븐 타이미야를 성보(城堡)에 감금하라고 명하였다. 이븐 타이미야는 거기에 감금되어 있다가 옥사하였다."
이븐 바투타, 『이븐 바투타 여행기』 1권, 정수일 역주, 창비, 2004, 147-148쪽.
먼저 왜 이븐 타이미야의 행동이 큰 반발을 일으켰을까? 강단을 내려오는 인간의 행위를 신이 하늘에서 내려오는 행위에 비유한 이븐 타이미야의 설교는 많은 무슬림 신학자들이 죄악으로 규정한 신인동형론(ananthropomorphism, tashbīh), 즉 신과 그 피조물인 인간을 동일시하며 신이 인간과 같은 속성과 형질을 가지고 있다는 주장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이다. 이를 본 이븐 바투타는 이븐 타이미야가 "정신이 이상했다(fī 'aqlihi shay'an)"고 말한다(Ibn Baṭṭuṭa, 69; 정수일의 번역본에서는 이 부분이 빠져있다). 맘루크 시대를 전공한 역사학자인 도널드 리틀(Donald P. Little)은 아예 이 주제로 "이븐 타이미야는 정신이 나갔는가?(Did Ibn Taymiyya Have a Screw Loose?)"라는 논문을 쓰기도 했다(Little, 93-111).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븐 타이미야가 제정신이었느냐의 문제가 아니다. 그의 말과 달리 이븐 바투타는 이 사건을 직접 목격할 수 없었다. 이븐 타이미야는 이븐 바투타가 다마스쿠스에 도착하기 두 달 전인 이슬람력 726년 7월에 이미 체포되었기 때문이다(Allouche, 287). 더 나아가 『여행기』에서 묘사되는 이븐 타이미야의 설교는 그가 다마스쿠스를 방문하기 약 20년 전인 1305/1306년에 있었던 일이다(앞의 글, 288; Little, 97). 이븐 바투타는 이븐 타이미야를 직접 볼 수도, 그의 그 유명한 설교를 직접 들을 수도 없었다. 하지만 이 부분에서 그는 그가 직접 볼 수 없었던 일을 마치 눈앞에서 직접 본 것처럼 이야기하고 있다.
4. 이븐 바투타는 정말 불가르, 콘스탄티노플과 중국을 방문했을까?
이븐 바투타는 『여행기』에서 콘스탄티노플, 러시아 초원의 불가르(Bulghar), 그리고 저 멀리 중국까지 여행한 이야기를 전한다. 하지만 위에서 소개한 여러 사례들에서 보았듯이, 이븐 바투타의 주장을 곧이 곧대로 완전히 믿기 전에는 일단 따져봐야 할 필요가 있다.
먼저 이븐 바투타의 불가르 방문은 지어낸 이야기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이븐 바투타는 그가 방문한 지역에 대해서는 지리, 환경, 건축물, 인물 등에 대해 항상 자세히 이야기하지만 - 설령 '표절'을 통해서라도 - 불가르에 대한 서술은 무미건조하기 짝이 없다. 카프카스의 비시 다그(Bish Dagh, 오늘날 러시아의 퍄티고르스크Pyatigorsk)에서 열흘을 걸려 불가르에 도착했는데, 그 곳은 밤이 길고 낮이 짧더라.....하는 내용이 다다. 그 머나먼 불가르까지 어떻게 갔으며 누구와 갔고 가서 누굴 만났고, 무얼 보았는지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다(이븐 바투타, 1권 486쪽). 불가르에 갔다면 분명히 보았을 볼가강(이틸강)에 대한 언급도 없다. 오히려 그는 이후 핫즈 타르한(Hajj Tarkhan)이라는 곳을 방문했을 때 볼가강을 처음 보고 설명하는 것처럼 "세계의 대강(大江)의 하나"(앞의 책, 491쪽)라고 말한다. 무엇보다도 이븐 바투타는 정말 불가르까지 갔다면 틀릴 수 없는 사실을 틀렸다. 그는 비시 다그에서 열흘이 걸렸다고 말했지만, 비시 다그에서 불가르는 약 1,300km 떨어져 있으며 이는 30~40일이 걸리는 거리다(Janicsek, 798). 또한 그는 불가르에서 눈과 얼음으로 뒤덮인 '암흑의 땅'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고 했지만, 이는 오히려 그가 불가르에 직접 가지 않았음을 반증한다. 왜냐하면 그가 정말 그의 주장대로 이슬람력 734년 9월, 즉 1334년 5~6월에 불가르에 머물렀다면 눈과 얼음으로 덮히지 않은 땅을 보았을 것이기 때문이다(앞의 글, 799-800). 불가르에 대한 이븐 바투타의 유일한 설명마저도 그의 직접 경험이 아니다. 그보다 앞서 이븐 파들란(Ibn Fadlan), 이스타크리(Istakhri), 이븐 하우칼(Ibn Hawqal)과 같은 여행자와 지리학자들은 이미 여러 차례 불가르의 밤과 낮의 길이에 대해 언급했으며, 이븐 바투타(또는 이븐 주자이)는 그저 이를 그대로 인용해 되풀이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앞의 글, 793-795).
다음은 그의 콘스탄티노플 방문에 대해서 살펴보자. 그는 킵차크 칸국의 칸 무함마드 우즈벡 칸(Muhammad Uzbek Khan, 재위 1313-1341)의 아내이자 비잔틴 제국 황제의 딸인 바얄룬(Bayalun, 정수일의 번역본에서는 빌룬)이 출산을 앞두고 친정으로 돌아가길 원하자 그녀를 따라 1334년 8월 콘스탄티노플에 도착했다고 밝힌다. 킵차크 칸국으로 시집간 황실의 딸에 관해 언급하는 비잔틴 측의 사료가 없다는 점을 근거로 『여행기』에 등장하는 공주가 실존 인물이 아니며 따라서 이븐 바투타의 이야기 역시 창작이라는 견해가 있었지만, 흐르벡은 1957년에 발견된 그리스 수도사들이 쓴 편지를 반례로 제시한다. 날짜가 1341년으로 되어 있는 이 편지에서 수도사들은 "야만인들(즉 킵차크 칸국의 타타르인들)과 결혼한 황제의 딸"에 관해 이야기한다(Hrbek, 474). 이로 미루어보아 이븐 바투타가 말한 그 공주는 - 이름이 무엇이든간에 - 아무튼 실존 인물로 보인다. 다만 당시 비잔틴 제국의 황제 안드로니코스 3세(Andronicos III, 재위 1328-1341)는 1297년 태어난 인물로 이븐 바투타가 콘스탄티노플에 도착한 1334년에는 아직 30대 초반이었고, 따라서 결혼 적령기에 다다른 딸이 있을 수 없었다. 이 점에 대해 흐르벡은 이 공주가 실제 황제의 적녀가 아닌 안드로니코스 3세의 사생아였을 가능성을 제시한다(앞의 글, 475).
이븐 바투타는 콘스탄티노플에서 아들에게 황위를 물려주고 퇴위해 수도자로서 살아가고 있는 황제 자르지스(Jarjis)를 만난 이야기를 전한다(이븐 바투타, 1권 499). 수도사가 된 황제와 예루살렘과 그 곳의 기독교도들에 관해 이야기를 나눈 이븐 바투타는 황제에게 성당에 들어가보고 싶다고 청했으나, 십자가에 예를 표할 수 없었기에 들어갈 수 없었다고 덧붙인다(앞의 책, 506). 문제는, 이븐 바투타가 콘스탄티노플에 머무르던 1334년에 비잔틴 제국에는 '선황'이 있을 수 없다는 점이다. 안드로니코스 3세의 아버지 미카엘은 1320년에 죽었으며, 그의 선황이자 할아버지인 안드로니코스 2세(Andronicos II, 재위 1282-1328)는 실제로 황위를 양위하기는 했어도 이븐 바투타가 콘스탄티노플에 오기 전인 1332년에 죽었다(Hrbek, 479-481). 그러면 이븐 바투타는 대체 누구를 만났던 것일까?
인도에서 동남아시아, 중국까지의 여정
남중국의 끝에서 북중국의 중심부까지 그 먼 거리를 여행했음에도
이븐 바투타의 중국에 관한 서술은 극히 피상적이다.출처: ko.wikipedia.org/wiki/%EC%9D%B4%EB%B8%90_%EB%B0%94%ED%88%AC%ED%83%80
마지막은 중국이다. 로스 던(Ross Dunn)은 동남아와 중국의 광활한 지역에 대한 그의 서술이 피상적이고 부정확하며 부실하다고 지적한다. 몰디브에서 벵갈, 수마트라, 북경까지 가서 다시 인도 말라바르로 돌아오는 그의 여정은 유라시아의 절반을 가로지르는 엄청난 범위를 아우르지만 『여행기』 전체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6%도 되지 않는다(Dunn, 252). 남중국의 천주(泉州)에서 항주(杭州)를 거쳐 대운하를 타고 북경에까지 이르는 수백 킬로미터의 장대한 여정에 관한 그의 서술은 짧고 간략하기 이를 데 없다(위의 책, 257-261). 이븐 바투타의 서술은 역사적 사실과 부합하지 않는 부분도 많다. 피터 잭슨(Peter Jackson)에 따르면 1346년 이븐 바투타가 광주(廣州)에서 본 모스크가 1343년에 파괴되어 1349-1351년에야 재건되었으며, 1347년에 북경에서 보았다는 황제의 장례식이나 원 황실 사이의 내분, 카라코룸으로의 천도에 관한 이야기는 그 어떤 사료에서도 확인되지 않는다(위의 책, 262에서 재인용). 데이비드 모건(David Morgan) 또한 이븐 바투타가 보았다는 중국 황제의 장례식에 의문을 제기한다(Morgan 5). 원의 마지막 황제인 순제(順帝)는 1333년 즉위해 주원장에 쫓겨 몽골 초원으로 피한 1368년까지 북경의 황제로 재위했으며, 이븐 바투타가 정말 1347년에 북경에 있었다면 황제의 장례식도, 황실 내부의 갈등도 볼 수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븐 바투타는 무엇을 본 것일까?
물론 피상적이고 부정확한 서술이 이븐 바투타가 중국에 가지 않았음을 입증하는 근거는 아니다. 『여행기』는 역참, 교초, 대운하, 도자기와 같은 특산품 등 원나라 지배 하 중국의 모습에 대해서도 부분적이나마 분명히 이야기하고 있다(이븐 바투타, 2권 322-346). 다만 이븐 바투타가 중국의 정확히 어디까지 여행했으며, 정확히 무엇을 직접 보고 경험했는지는 의문이 남을 수 밖에 없다. "누구도 이븐 바투타가 극동에 가지 않았다거나, 최소한 남중국의 항구보다 더 멀리 가지 않았음을 완벽하게 입증하지 못했다. 이 여행의 수수께끼는 해법을 거부하는 것 같다"는 던의 신중한 결론이 아마 우리가 도달할 수 있는 최선은 아닐까(Dunn, 253).
5.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행기』의 가치
그러나 '표절'과 '창작', 신뢰성이 의심스러운 이야기들에도 불구하고 『여행기』 전체를 이븐 바투타(또는 이븐 주자이)의 단순한 상상의 산물 - 소위 '뇌피셜' - 로 치부할 수는 없다. 표절을 철저히 금지하는 오늘날의 학문 윤리는 14세기 이븐 바투타의 시대에는 존재하지 않았으며, 중세 이슬람권에서 기존 문헌의 인용 또는 '표절'은 오늘날과 같은 의미에서의 표절이 아닌, 다만 선학들의 뛰어난 문체와 비유를 계승하기 위한 일반적인 문필 관습 중 하나였다(위의 책, 313). 의도치 않은 '표절'은 아마 이븐 바투타의 기억의 한계를 보완하고 『여행기』의 문학적 성취를 높이는 한편 '무슬림이 살고 있는 모든 지역'에 대한 기록을 남기기 위해 이븐 주자이가 다른 여행기와 지리학 서적을 참고한 결과일 수도 있다.
무엇보다도 이븐 바투타(또는 이븐 주자이)는 과거 여행자들의 기록에 그가 직접 경험하거나 들은 내용을 덧붙임으로써 『여행기』에 그가 활동한 14세기의 시대적 환경이 드러나도록 만들었다. 지난 글에서 다루었던 쉬아파에 대한 이븐 바투타의 인식이 그 예이다. 모든 쉬아파를 가리켜 '라피다(al-Rāfiḍah)'라는 비하적 칭호를 사용하고 모든 쉬아파를 싸잡아 정통 신앙에서 벗어난 이단으로 규정하는 이븐 바투타와 달리, 이븐 주바이르는 쉬아파 내의 주류라고 할 수 있는 열두 이맘 쉬아파와 순니파의 시각에서 특히 과격한 신앙을 가진 집단을 구분하고 전자와 구분되는 후자만을 '라피다'라고 부른다(Ibn Jubayr, 252). 이븐 바투타가 여행 도중에서 만난 쉬아파에 노골적인 반감과 불쾌감을 숨기지 않는 반면, 이븐 주바이르는 쉬아파에 대해서 거의 언급하지도 딱히 그들에 대한 뚜렷한 반감을 드러내지도 않는다. 메카와 이라크 사이에 위치한 알마르줌(al-Marjum, 돌에 맞아 죽은 또는 돌에 맞아 죽은 사람)이라는 지명의 유래에 대해서도 이븐 바투타는 예언자의 교우들을 비난한 쉬아파 순례자가 순니파들에 의해 돌에 맞아 죽었기에 이런 이름이 붙었다고 설명하는 반면(이븐 바투타, 1권 259), 이븐 주바이르는 그저 "한 왕이 투석형을 받아 마땅한 일을 저지른 누군가를 투석형에 처했다고 한다"고 담담하게 말할 뿐이다(Ibn Jubayr, 185). 이처럼 두 여행자는 같은 지역을 여행했음에도 서로 다른 시대에 살았기에 다른 관점으로 그들이 사는 세상을 바라보았다. 이처럼 『여행기』를 통해 우리는 13세기 몽골 침략이 이븐 주바이르가 활동했던 12세기와 이븐 바투타가 살았던 14세기 사이 중동의 종파 관계를 어떻게 변화시켰는지를 가늠해 볼 수 있다.
모건은 또한 킵차크 칸국, 차가타이 칸국, 일 칸국에 관한 이븐 바투타의 서술, 즉 앞선 여행가들의 기록을 참고할 수 없던 시대와 지역에 대한 그의 기록이 가지는 가치를 높이 평가한다. 이슬람화한 몽골 군주들 사이에서 여전히 유지되고 있던 칭기즈칸의 야사(Yasa)의 중요성, 페르시아 정주 문화가 지배적이었던 일 칸국과 유목민의 문화와 관습이 여전히 강하게 작동하던 킵차크 칸국과 차가타이 칸국의 차이, 오스만 제국이 여전히 형성기에 머무르고 있던 14세기 아나톨리아 지역의 상황 등 『여행기』는 몽골 제국의 지배가 황혼기에 접어들던 14세기의 다양한 상황을 보여준다(Morgan, 5-11). 『여행기』에 나타나는 여러 오류와 '표절'을 파악하는 것과, 이븐 바투타(또는 이븐 주자이)의 작업이 지닌 가치를 완전히 부정하는 것은 전적으로 다른 문제다.
웨인스 역시 『여행기』를 단순히 앞선 여행자들의 기록을 '표절'한 작업물로 치부하는 시각이 지나치게 과장되었다고 비판한다. 이븐 바투타는 이븐 주바이르는 상상도 하지 못했을 바그다드의 쇠퇴한 모습을 그대로 묘사하고 있으며(웨인스, 39-42), 팔레스타인과 시리아, 히자즈에서도 이븐 주바이르의 기록에는 언급되지 않는, 그가 직접 경험한 새로운 사실들을 추가했다(위의 책, 37-38; 42-45). 중국을 여행하고 돌아오는 길에 이븐 바투타는 1348년 시리아와 팔레스타인, 이집트를 덮친 흑사병의 참상에 대해서도 전한다(이븐 바투타, 2권 360-362). 소소하게는 알렉산드리아 등대가 정확히 언제 완전히 파괴되었는지도 『여행기』를 통해 알 수 있다. 1325년 알렉산드리아를 처음 방문했을 때 이븐 바투타는 알아브다리의 서술을 인용해 등대의 한 쪽 벽만 파괴되어 있었지만 내부에는 들어갈 수 있었다고 기록한 반면, 1349년에 다시 알렉산드리아에 돌아왔을 때에는 등대가 완전히 파괴되어 들어갈 수 없었다고 덧붙인다(이븐 바투타, 1권 44). 이처럼 『여행기』는 이븐 바투타(또는 이븐 주자이)가 단순히 과거 여행자들의 기록을 짜깁기한 결과물이 아닌, 기존의 기록에 그만의 새로운 경험과 시각이 더해져 만들어진 독창적인 성과라고 할 수 있다.
이븐 바투타의 여행은 그의 시대에도 사람들 사이에서 불신과 논쟁을 불러 일으켰다. 안달루시아의 법학자였던 아부 알바라카트 알발라피키(Abu al-Barakat al-Balafiqi)는 이븐 바투타가 "완전한 거짓말쟁이"라고 비난했으며, 14세기 북아프리카의 역사학자 이븐 할둔(Ibn Khaldun, 1332-1406) 역시 이븐 바투타의 이야기를 그리 신뢰하지는 않았다. 어느 날 그는 술탄의 재상 파리스 이븐 와드라르(Faris ibn Wadrar)를 만나 많은 사람들이 이븐 바투타의 이야기를 믿지 않으며 자신 또한 그렇다고 말하자, 재상은 말했다: "여러 왕조들의 상황에 관한 이야기를 쉽게 부인해서는 안됩니다. 그대가 직접 그대 눈으로 본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Dunn, 316).
목적과 의도, 집필 과정이 무엇이었든 이븐 바투타와 이븐 주자이는 『여행기』를 남김으로써 그들의 역할을 다했다. 그들의 성취를 판단하고 해석하는 과제는 이제 『여행기』를 읽는 우리에게 남겨졌다.
참고문헌
데이비드 웨인스. 『이븐 바투타의 오디세이』, 이정명 옮김, 산처럼, 2011.
이븐 바투타. 『이븐 바투타 여행기』 1권, 정수일 역주, 창비, 2004.
이븐 바투타. 『이븐 바투타 여행기』 2권, 정수일 역주, 창비, 2004.
Dunn, Ross E. The Adventures of Ibn Battuta: A Muslim Traveler of the Fourteenth Century, Berkeley and Los Angeles,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2012.
Elad, Amikam. "The Description of the Travels of Ibn Baṭṭūṭa in Palestine: Is It Original?" The Journal of the Royal Asiatic Society of Great Britain and Ireland 119, no. 2 (1987): 256-272.
Gibb, H. A. R. “Appendix: A Provisional Chronology of Ibn Baṭṭūṭah’s Travels in Asia Minor and Russia”, In The Travels of Ibn Baṭṭūṭa A.D. 1325-1354, vol. 2, H. A. R Gibb (trans.), 528-537, London, Hakluyt Society, 1962.
Hrbek, Ivan. “The Chronology of Ibn Baṭṭūṭa’s Travels”, Archiv Orientální 30 (1962): 409-486.
Ibn Battuta, Riḥlat Ibn Baṭṭuṭa: Tuḥfat an-Nuẓẓār fī Gharāʾib al-Amṣār wa ʿAjāʾib al-Asfār, Windsor: Mu'wassat Hindawi, 2020.
Ibn Jubayr. Riḥlat Ibn Jubayr, Beirut: Dar Ṣādir, 1980.
Janicsek, Stephen. "Ibn Baṭṭūṭa’s Journey to Bulghār: Is It a Fabrication?" The Journal of the Royal Asiatic Society of Great Britain and Ireland 4 (October 1929): 791-800.
Little, Donald P. "Did Ibn Taymiyya Have a Screw Loose?" Studia Islamica 41 (1975): 93-111.
Morgan, David O. "Ibn Baṭṭūṭa and the Mongols." Journal of the Royal Asiatic Society 11, no. 1 (April 2001): 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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