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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중동

아랍의 억압자 또는 이슬람의 보호자: 오스만 제국에 대한 역사적 기억의 대립

by katib 2019. 11. 12.

맘루크 기병의 훈련

출처: Reuven Amitai and Gila Kahila Bar-Gal. "The Mamluk’s Best Friend: The Mounts of the Military Elite of Egypt and Syria in the Late Middle-Ages." In Animals and Human Society in Asia: Historical, Cultural and Ethical Perspectives (London: Palgrave Macmillan, 2019), 275.


오스만 지배는 아랍인들에게 어떤 영향을 남겼는가? 

1516년, 오스만 제국의 술탄인 셀림 1세(Selim I, 1512-1520)는 시리아와 이집트를 정복하기 위해 맘루크 술탄국에 대한 침공을 개시했다. 1516년 8월 24일 오늘날 시리아 알레포 북부에 위치한 마르즈 다비크(Marj Dabiq)에서 벌어진 오스만 제국군과 맘루크 술탄국의 전투는 오스만 제국의 승리로 끝났고, 맘루크 측은 술탄 알 아슈라프 칸수 알 구리(Al-Ashraf Qansuh al-Ghuri, 1501-1520)가 전사하는 등 막대한 피해를 입고 물러났다. 마르즈 다비크의 승리를 토대로 시리아와 팔레스타인 전역을 장악한 오스만 제국은 1517년에는 마침내 맘루크 술탄국의 근거지인 이집트까지 점령했으며 마지막 맘루크 술탄인 투만 베이 2세(Tuman Bay II, 1516-1517)는 카이로 성문 밖에서 처형되었다. 1258년 바그다드가 함락된 이후 카이로에 머물압바스 가문의 마지막 칼리프 알 무타왁킬 3세(Al-Mutawakkil III, 1508-1517)로부터 칼리프위(位)를 양위받고 맘루크 술탄이 관할하던 성지 메카와 메디나까지 지배하면서 오스만 제국의 술탄은 막강한 군사력에 더불어 "두 성지와 이슬람의 보호자"라는 강력한 종교적 권위까지 확보하게 되었다. 


술탄 셀림 1세

출처: 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Sultan_selim_i_-_Sahand_Ace.jpg


술탄 쉴레이만 1세

출처: https://en.wikipedia.org/wiki/Suleiman_the_Magnificent


셀림 1세의 후계자인 쉴레이만 1세(Süleyman I, 1520-1566)가 이라크에 대한 오스만 제국의 패권을 확보하고 현지 통치자들을 통해 알제에서 튀니스에 이르는 북아프리카 지역까지 영향력을 행사하면서 16세기에 이르러 모로코를 제외한 거의 모든 아랍 지역은 1918년 1차 세계대전 이후 오스만 제국이 분할되고 서구 열강이 아랍 지역을 분할해 지배할 때까지 오스만 제국의 지배와 영향력 아래 놓여 있었다.


<오스만 제국의 확장 과정>

출처: https://www.britannica.com/place/Ottoman-Empire


오스만의 지배는 아랍 지역에 어떤 영향을 남겼을까? 20세기 이후 아랍 지역의 쇠퇴와 침체, 그리고 식민지배는 오스만 지배가 남긴 결과였을까? 이는 세밀한 분석과 검토 없이는 결코 쉽고 간단하게 답할 수 없는 질문이다. 400년에 가까운 오랜 기간 동안 이어진 오스만의 아랍 지배를 간단하게 한 단어로 규정하는 것은 지나친 일반화와 이분법적 시각의 함정을 결코 피할 수 없다. 단순한 흑백논리에 따라 오스만 제국을 "아랍 지역의 쇠퇴를 가져온 침략자이자 점령자" 또는 "외세 침투로부터 아랍과 무슬림을 지켜낸 이슬람의 보호자"라고 정의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과거가 남긴 유산과 영향을 엄밀히 평가하는 작업과 과거를 특정한 방식으로 기억하는 것은 분명히 다르다. 우리는 그리고 많은 사람들은 때때로 과거가 지닌 다면적이고 복잡한 성격을 단순화하여 '우리'와 '타자'를 구분하는 간단하고 명료한 이분법적 시각을 통해 과거를 바라보고는 한다. 이러한 역사적 기억은 오늘날 '우리'와 '타자'를 구분하는 기준을 과거로 역() 투사하여 지금 현재 우리와 타자 사이에 전개되는 갈등과 대립이 마치 머나먼 과거부터 끝없이 이어져온 역사적 '사실'로 그려내는 한편 '타자'를 머나먼 과거부터 항상 '우리'를 위협하고 착취하고 지배하며 억압해온 '적'으로 규정한다. 특히 19세기와 20세기 들어 아랍 민족주의가 부상하고 아랍 민족이라는 새로운 정체성 기준이 기존에 오스만인과 아랍인을 결속해주던 전통적인 무슬림 정체성과 경합하면서 오스만 제국은 점차 '같은' 무슬림에서 아랍인과는 '다른' 투르크인으로 규정되기 시작했고 그 결과 "아랍인에 대한 투르크인의 부당한 착취와 탄압과 억압"이라는 시각이 오스만 시대에 대한 오늘날 아랍인들의 기억에서 주요한 주제로 떠오르게 되었다. 또한 오스만 시대에 대한 역사적 기억의 차이는 무슬림 정체성과 아랍 정체성 사이의 경합을 반영한다. 무슬림이라는 정체성을 강조하는 측이 오스만 제국을 "비무슬림의 위협으로부터 아랍과 무슬림 공동체를 지켜낸 이슬람의 보호자"로 바라보고 오스만 제국 시대를 "아랍인이 칼리프가 다스리던 무슬림 통일제국의 일원이었던 마지막 시기"로 그려낸다면 투르크인을 아랍인과 구분되는 민족적 타자로 바라보는 측은 오스만 제국을 "아랍인의 착취하고 지배한 점령자"이자 "아랍인의 쇠퇴를 가져온 원인"으로 규정한다. 과거는 지나갔고 과거의 사실은 바뀌지 않는다. 그러나 과거가 기억되고 현재와 연결되는 방식은 과거를 기억하는 이가 처한 환경과 상황에 따라 항상 변화한다.


오스만, 아랍 쇠퇴와 퇴보의 원인

오스만 시대를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아랍인들의 역사적 기억은 2018년 11월 1일 아랍 언론매체인 라시프 22(Raseef 22)에 실린 이라크 언론인인 알리 아딥(Ali Adib)의 글 "오스만 제국이 아랍의 퇴보 원인인가? (Hal kana al-'uthmaniyyun sabab ta'akhkhur al-'arab?)"라는 글에서 엿볼 수 있다. 그는 오스만 지배 하 아랍 지역이 "학문과 문명, 사상적 측면에서 역사로부터 벗어나 있었다"고 비판한다. 오스만의 통치자들은 아랍인들을 지킨다는 구실로 아랍인들을 세계의 변화로부터 고립시켰고 아랍 지역의 문화적 발달과 학문의 성장을 위한 노력은 방치한 채 오직 세금 징수와 징병에만 관심을 기울였다. 아딥은 오스만 제국의 인쇄술 금지 정책과 교육에 대한 무관심으로 인해 아랍 지역의 학문과 사상, 문명 발전이 정체되고 결국 유럽에 비해 뒤쳐졌다고 주장한다. 더 나아가 오스만 제국의 억압적 지배 아래에서 아랍인들은 권리를 갖춘 "시민"이 아니라 납세와 병역의 의무만을 짋어진 "신민"으로 간주되었으며 시민 전체의 경제적, 사회적, 정치적 수준 향상을 위해 국가 자산을 투입하던 유럽과 달리 오스만 제국은 신민을 착취 대상으로만 바라보았다고 지적한다. 아딥이 보기에 400년에 걸친 오스만의 지배는 아랍 지역의 고립과 학문, 문화, 사상, 경제, 사회 등 전 분야에서 정체와 퇴보 그리고 아랍 지역의 식민지화를 가져왔다.


오스만 제국에 대한 아딥의 부정적 논조는 오스만 지배 하의 아랍 지역과 아랍 무슬림이 약 800년 가까이 지배한 안달루스, 즉 오늘날의 스페인 사이에 존재하는 극명한 차이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아딥은 아랍 무슬림이 지배하던 시기 안달루스 지역은 유럽 기독교도 학자들도 찾아오던 학문과 문명의 중심지였으며 철학자이자 의학자인 이븐 루쉬드(Ibn Rushd, 1198년 사망), 아랍 최초의 사회학자인 이븐 칼둔(Ibn Khaldun, 1406년 사망), 철학자, 작가이자 과학자인 이븐 투파일(Ibn Tufayl, 1185년 사망)과 같은 인류 문화에 발자취를 남긴 뛰어난 학자들이 태어나고 활동하던 지역이었음을 강조한다. 이와 달리 오스만 지배 하 아랍은 문화적 침체와 퇴보 그리고 억압과 착취만을 겪었을 뿐이다. 또한 아딥은 아랍 무슬림 문화가 남긴 문화적 유산과 영향은 레콩키스타가 완료된 이후에도 사라지지 않은 반면, 오스만의 군사적 지배는 어떤 긍정적인 유산도 남기지 못한 채 오스만 제국의 군인들이 아랍 지역을 떠나자마자 바로 사라졌음을 역설한다아딥은 오늘날 아랍인들이 자부심을 가지고 아랍 지역의 진보와 발전을 위해 되살려야 하는 역사는 이제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으며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지나간 과거일 뿐이자 새로운 과학과 기술이 필요한 현대 사회에는 아무 쓸모도 없는 오스만 제국의 군사적 유산, 즉 "빈의 성벽을 위협하던 오스만 제국 군대의 말발굽"도 "오스만 포병대의 포성과 칼리프의 깃발"이 아니라 "수백 권의 책을 보관하던 압바스 시대 바그다드의 도서관"라고 강조한다.


나폴레옹의 이집트 원정은 아랍인들의 문화적 충격 외에도 이집트학의 재발견을 가져왔다.

장 레옹 제롬(Jean-Léon Gérôme)의 "스핑크스 앞에 선 나폴레옹(1868)"

출처: https://en.wikipedia.org/wiki/French_campaign_in_Egypt_and_Syria


아랍의 다른 지식인들 역시 오스만 제국의 아랍 지배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을 공유한다. 이집트의 저술가인 후세인 파우지(Husayn Fawzi, 1988년 사망)는 오스만 제국 지배 하 이집트는 1798년 나폴레옹의 침공과 무함마드 알리(Muhammad Ali, 1805-1848년 재위) 왕조가 수립될 때까지 약 300년 간 학문적, 사상적 흐름과 고립된 채 정체 상태에 머물렀다고 주장하며 오스만 지배 시기를 힉소스인의 침공과 더불어 "이집트 역사의 가장 어두운 시기"라고 불렀다. 마찬가지로 이집트 헬완 대학교(Helwan University)의 현대사 교수인 아심 앗 두수키(Asim al-Dusuqi)는 오스만 제국의 아랍 지배는 "세금, 통치, 지배" 단 세 단어로 요약될 수 있는, 아랍 지역에 어떠한 긍정적인 변화나 발전도 남기지 못한 시대로 본다. 라시프 22의 기자 싸르와트 알 비타위(Tharwat al-Bitawi)와의 인터뷰에서 두수키 교수는 오스만 제국은 "영국이나 프랑스 식민지배와 마찬가지로 4세기 동안 아랍 지역을 지배하던 점령자"이자 "아랍 지역의 자원을 착취하고 그 대가로 약화와 정체"만을 만을 남겨놓은 "식민 제국" 에 불과하다고 선을 긋는다. 두수키 교수의 시각에 따르면 오스만 제국의 지배 아래에서 아랍인들은 문화적 발전과 부흥에 필수적인 안정을 박탈당했을 뿐만 아니라 이스탄불 궁정의 식민 지배 아래에서 고통을 겪었다. 이러한 관점에서 1798년 나폴레옹의 침공은 아랍인들을 각성하고 자신들이 처한 침체와 퇴보 상황을 똑바로 인식하게 만든 일종의 "문명적 충격"과도 같은 사건으로 해석된다. 또한 그는 오스만 제국의 아랍 지배를 '이슬람의 확장(fath)'의 한 부분으로 이해하고 오스만 제국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시각은 "무슬림이 다른 무슬림의 영토를 점령하는 것은 이슬람의 확장(fath)이라고 부를 수 없다"는 점에서 역사적 사실과 배치됨을 지적하며 이러한 향수가 종교적 감상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비판한다. 


탄압과 박해의 기억

탈랄 이븐 칼리드 앗 투라이피(Talal ibn Khalid al-Turayfi) 사우디아라비아의 이맘 무함마드 이븐 사우드 대학교(Imam Muhammad ibn Saud Islamic University) 현대사 교수는 2019년 9월 22일 범아랍 일간지인 앗샤르크 알아우사트(Al-Sharq al-Awsat)에 기고한 글인 "오스만인들은 아랍 세계에 죽음의 향기를 가져왔다(Al-'uthmaniyyun ja'u ila al-watan al-'arabi bi-ra'ihat al-mawt)"에서 셀림 1세의 이집트 침공과 동시대 역사가인 무함마드 이븐 이야스(Muhammad ibn Iyas, 1524년 사망)나 쉴레이만 1세의 다마스쿠스 정복과 동시대에 활동한 샴스 앗 딘 무함마드 이븐 툴룬(Shams al-Din Muhammad Ibn Tulun, 1548년 사망)의 기록을 인용해 오스만의 이집트와 시리아 정복 과정이 학살, 파괴, 약탈과 아랍 무슬림을 잡아 노예로 만들고 라마단 기간에 드러내놓고 술을 마시는 등의 비이슬람적이고 야만적인 행위로 점철되었다고 비난한다. 이처럼 파괴와 죽음으로 시작된 오스만의 아랍 지배는 19세기 말과 20세기 초 아랍 민족주의 운동가들에 대한 오스만 중앙정부의 가혹한 탄압까지 이어진다. 


투라이피 교수는 오스만 제국이 두 성지인 메카와 메디나가 있는 헤자즈를 제외한 아라비아 반도를 방치함으로써 아라비아 반도 지역 대부분이 수많은 부족으로 분열된 채 서로 대립하고 싸우도록 방조했으며, 이로 인해 아라비아 반도가 정치적, 문화적, 경제적, 사회적으로 쇠퇴하고 퇴보했다고 지적한다. 오스만 제국의 시리아와 이집트 지배의 가혹함과 탄압을 강조하던 그가 아라비아 반도에 대한 오스만 제국의 무관심과 방치를 비난하는 것은 다소 역설적이다. 투라이피의 관점에서 오스만의 지배를 받은 이집트와 시리아의 퇴보는 오스만 제국의 지배 때문이며, 반대로 오스만 제국의 영향력 외부에 있던 아라비아의 혼란은 오스만 제국의 무관심 때문이다. 이처럼 그는 어떠한 식으로든 오스만 제국을 아랍 지역의 혼란, 정체, 퇴보, 억압과 연관짓는다. 또한 그는 18세기 무함마드 이븐 사우드(Muhammad ibn Saud, 1765년 사망)와 무함마드 이븐 압둘 와합(Muhammad ibn Abd al-Wahhab, 1792년 사망)이 세운 제1사우디 왕국이 "성지에 대한 아랍인의 지배권 탈환"이었음을 강조한다. 그러나 아랍인의 독립과 주권 탈환을 두려워하던 오스만 제국은 제1사우디 왕국의 지도자들의 머리를 포문에 묶은 채 발포하거나 참수한 시체를 내버리는 식으로 무자비하게 탄압했으며 그 중심지인 나즈드를 철저하게 파괴하고 유린하여 보복했다. 


뿐만 아니라 오스만 제국은 그 옹호자들이 주장하듯이 서구 식민지배세력에 맞선 이슬람의 보호자도 아니었다고 투라이피 교수는 지적한다. 오스만 제국이 아랍인들을 살해하고 강제추방하며 가혹하게 대했으며, 심지어 서구의 식민지배도 오스만 제국의 가혹한 통치에는 비할 수 없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그의 관점에 따르면 터키의 역사적 프로파간다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하여 오스만 제국을 '이슬람의 보호자'로서 우호적으로 바라보는 일부 아랍인들은 따라서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간과하고 있다. 그는 또한 오스만 제국을 비판하는 행위를 "유럽 시각의 영향"이자 "인종차별"이라고 대응하는 옹호자들에 대해 바로 오스만 제국이 아랍인들에게 터키어를 강제하여 아랍인들의 정체성을 제거하고자 했음을 강조한다. 


관용과 성장

한편 레바논대학교(Lebanese University)에서 오스만사를 가르치는 교수로 재직하던 잇삼 칼리파(Issam Khalifah)는 다소 다른 입장을 취한다. 2019년 9월 22일 앗샤르크 알아우사트(Al-Sharq al-Awsat)에 기고한 "오스만 시대의 역사가 남긴 부정적 측면과 긍정적 측면(Salbiyyat wa ijabiyyat fi tarikh al-dawlah al-'uthmaniyyah)"에서 그는 레바논의 드루즈파, 쉬아파의 반란을 촉발한 오스만 정부의 징세와 징병 조치와 반란을 진압하기 위한 정부의 가혹한 탄압과 처벌, 그리고 마론파를 포함한 레바논 기독교도에 대한 오스만 당국의 차별과 박해에 관해 언급한다. 심지어 1차 대전이 발발하자 이스탄불 정부는 자발 레바논(Jabal Lebanon) 지역의 기독교도 공동체가 유럽 연합국과 협력할 것을 우려하여 이 지역 인구 1/3의 죽음을 가져온 기근을 의도적으로 촉발하기도 했다고 칼리파 교수는 주장한다. 또한 오스만 정부는 레바논 아랍인의 아랍 정체성을 억압하고 터키어를 강제했으며, 오스만의 레바논 총독 자말 파샤(Jamal Pasha)는 아랍 민족주의 운동을 이끌던 무슬림과 기독교도 지도자들을 처형하기 위한 교수대를 세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칼리파 교수는 이러한 부정적이고 가혹한 면 외에도 오스만 지배에 다른 측면이 존재했음을 분명히 지적한다. 오스만 정부는 일반적으로 기독교도의 독자적인 관습과 법률, 신앙에 개입하지 않았으며 이러한 면에 힘입어 레바논의 기독교도 분포는 오스만 제국 지배 아래에서 더욱 확대될 수 있었다고 그는 강조한다. 또한 오스만 정부는 레바논에 제한적이나마 자유로운 언론과 학교 설립을 인정하기도 했다. 이처럼 오스만 정부와 아랍인 신민 사이에는 복잡하고 다면적인 관계가 있었기에 오스만 제국이 대한 비난은 그 시대 전체가 아닌 "특정 사건과 특정 시기, 특정 인물"에 집중되어야 한다는 것이 칼리파 교수의 의견이다. 카이로 대학교(Cairo University) 역사학과 교수 무함마드 아피피(Muhammad Afifi) 또한 중동 내 소수 종교 집단에 대한 오스만 정부의 정책, 즉 카스티야 왕국의 이베리아 반도 탈환 이후 추방된 유대인들에게 피난처를 제공하고 제국 내 다양한 종교 집단에게 높은 수준의 자치성과 일정 정도의 권리를 보장한 오스만 제국의 관용적이고 개방적인 정책을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게오르그 막코(Georg Macco, 1866-1933)이 그린 19세기의 카이로

출처: https://en.wikipedia.org/wiki/Cairo


한편 오스만 제국사 전문 연구자인 카림 압둘 마지드(Karim Abd al-Majid)는 오스만 제국의 지배 아래에서 아랍 지역이 쇠퇴하고 침체했다는 주장을 반박하며 오스만 제국이 유럽 국가의 침입과 지배로부터 아랍 지역과 이슬람을 지켜냈을 뿐만 아니라 압바스 왕조가 붕괴한 이후 처음으로 중동 내 광범위한 지역을 통합하여 교역과 교류를 촉진했다고 주장한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카이로, 다마스쿠스, 바그다드, 메디나, 메카 등의 도시는 오스만 제국 아래에서 번영하고 성장했으며 특히 카이로의 도시 면적은 오스만 시대 들어 50%가 늘어났다. 마찬가지로 아피피 교수 역시 시리아와 이라크 지역의 쇠퇴 원인은 오스만 제국의 착취가 아닌 몽골 침공이었으며 오히려 오스만 시대 아랍 지역 도시들의 인구가 대폭 성장했다고 강조한다. 


역사가 현재를 만날 때

오스만 제국의 아랍 지배가 남긴 영향과 유산을 둘러싼 논쟁은 단순히 학계와 지식인 사이에 국한되어 있지 않다. 오스만 제국에 대한 기억의 대립은 2011년 '아랍의 봄' 이후 중동 지역 내 영향력 확대를 추구하는 레젭 타입 에르도안(Recep Tayyip Erdoğan) 터키 대통령의 행보와 이를 경계하는 아랍 국가 정치인들 사이에서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에르도안 대통령의 공격적, 확장적 대외정책이 '오스만 제국의 부활 야욕'이며 이를 위해 오스만 제국을 긍정적으로 묘사하는 역사적 기억이 정치적으로 구성되고 동원되고 있다고 비난하는 아랍 지식인들과 정치인들의 반응은 오늘날 아랍 지역에서 오스만 제국과 관련된 기억이 어떤 의미로 이용되는지를 보여준다. 그리고 이러한 맥락에서 오스만 제국에 대한 비난은 터키의 확장 야욕을 비판하는 수단으로 동원되며, 에르도안의 터키 정권은 아랍 측의 역사적 공격에 강경한 반응을 보임으로써 터키의 자존심을 지켜내는 강력한 지도자임을 터키 국민들에게 각인시키고자 한다.


파크리 파샤, 메디나의 방어자 또는 메디나의 학살자

출처: https://en.wikipedia.org/wiki/Fakhri_Pasha


한 예로 터키의 세력 확대를 경계하는 아랍 진영의 주요 구성원인 UAE의 외무장관인 쉐이크 압둘라 이븐 자이드 알 나흐얀(Sheikh Abdullah bin Zayed Al Nahayan)은 2017년 12월 17일 "1916년 터키인인 파크리 파샤(Fakhri Pasha)는 예언자의 도시 메디나의 시민들에게 범죄를 자행했다. 그는 그들의 돈을 갈취하고 납치하여 기차에 태워 '세페르베를릭(Seferberlik, 동원)'이라는 이름 아래 시리아와 이스탄불로 보냈다. 또한 터키인들은 메디나의 마흐무디야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던 필사본을 훔치고 터키로 보냈다. 이들이 바로 에르도안의 조상이며 그들이 아랍인에게 자행한 역사다"라는 알리 알 이라키(Ali al-Iraqi)라는 인물의 트윗을 리트윗했다. 터키 정부는 UAE 외무장관의 리트윗에 격렬한 반응을 보였다. 정부는 터키 주재 UAE 대사를 초치하여 항의했으며 이브라힘 칼린(Ibrahim Kalin) 터키 대통령실 대변인은 "파크리 파샤(파흐렛딘 파샤Fahreddin Pasha)는 1916년부터 1919년까지 영국에 맞서 메디나를 용감하게 지켜냈다"고 주장하며 해당 리트윗이 "거짓 선동"이라고 일축했다. 에르도안 대통령은 한술 더 떠 "우리 조상인 파흐렛딘 파샤가 메디나를 지킬 때, 우리를 중상모략하는 그대 안쓰러운 자의 조상은 어디에 있었나?"고 매우 격렬한 논조를 써가며 반발했다. 그는 또한 "우리는 우리의 역사와 파흐렛딘 파샤를 비난하는 자들이 누구인지 알고 있으며, 적절한 때가 되면 누구인지 공개할 것이다. 아랍 국가의 지도자 일부가 그들의 무지함과 무능력함 그리고 배신을 숨기기 위해 터키를 공격한다는 점은 분명하다"고 주장했다. 더 나아가 터키는 UAE 대사관이 있는 앙카라의 거리를 "파흐렛딘 파샤 거리"로 개명하는 뒤끝있는 보복을 감행하기도 했다.


1차대전 발발 이후 오스만 제국의 '총동원(seferberlik, سفربرلك)' 포스터

출처: https://ar.wikipedia.org/wiki/%D8%B3%D9%81%D8%B1_%D8%A8%D8%B1%D9%84%D9%83_(%D9%86%D9%81%D9%8A%D8%B1_%D8%B9%D8%A7%D9%85_1914)


파크리 파샤 또는 파흐렛딘 파샤는 1916년부터 1919년까지 오스만 제국의 마지막 메디나 총독을 지낸 장군으로 1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과 샤리프 후세인(Sharif Husayn)이 이끌던 아랍 봉기군에 맞서 메디나의 방어를 지휘했다. 2018년 11월 1일 라시프 22에 실린 싸르와트 알비타위의 글 "아랍인, 투르크인, 오스만인...조상들의 역사를 끝없이 파헤치기('Arab wa atrak wa 'uthmaniyyun...nabsh mustamirr fi tarikh al-ajdad)"에 따르면 터키에서는 파크리 파샤를 "사막의 호랑이" 또는 "투르크의 호랑이"라고 부르며 그를 외세와 반역자에 맞서 예언자의 성스러운 도시를 지켜낸 영웅으로 그려내는 반면 일부 아랍측 자료에서는 그를 메디나 시민들을 강제로 징집하고 탄압했던 강압적인 통치자로 묘사한다. 아랍측의 역사적 기억에 대해 터키 역사학자인 아나스 데미르(Anas Demir)는 그가 영국인의 침략에 맞서 2년 7개월에 걸쳐 용감하게 메디나를 방어했으며 점령지의 귀중한 유물을 약탈하는 영국인들로부터 이슬람의 성스러운 유물을 지켜내고자 이를 이스탄불로 보낸 영웅이자 선각자라고 반박하는 동시에 그가 폭군이 아닌 포위 기간 동안 메디나 주민들에게 식량과 돈을 나눠준 관대한 통치자였음을 강조한다. 


오스만 제국을 둘러싼 아랍 측과 터키 측의 기억의 갈등은 최근에도 다시 촉발되었다. 2019년 9월 1일, 미셀 아운(Michel Aoun) 레바논 대통령은 "1516년부터 1918년까지 4세기하고 2년 동안 레바논인은 오스만의 지배 아래 있었다. 일정 정도 자치권을 누렸음에도 레바논 주민들은 많은 고통을 겪었다. 레바논인에 대한 오스만 정부의 테러 행위, 특히 1차 세계대전 시기의 테러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이 기근과 징집, 강제노동 그리고 저항과 해방의 정신을 꺾기 위한 교수대의 희생자가 되었다"고 발언했다. 이번에도 터키 정부는 아운 대통령의 발언을 "헛소리"라고 강하게 공격했으며, 터키 주재 레바논 대사를 초치하여 항의와 해명을 요구했다.


무함마드 아피피 교수가 지적하듯이, 그리고 모든 역사적 사건과 시대가 그러하듯이 오스만 제국의 아랍 지배는 "절대악" 또는 "축복받은 선"이라는 단순한 이분법적 구도로 환원될 수 없는 복잡하고 다층적인 성격을 지닌다. 근대 민족주의의 부상 이전까지 오스만 제국의 영역에서 가장 중요한 집단 구분 기준과 정체성은 곧 종교였고 따라서 같은 무슬림이었던 아랍인과 투르크인의 경계는 오늘처럼 분명하지 않았다. 아피피 교수는 오스만 시대 "투르크인"이라는 표현은 야만적이고 거친 유목민을 가리키는 멸칭으로 사용되었으며 오스만 제국의 군주들은 스스로를 "(야만적인 유목민인) 투르크인"이 아닌 "오스만인"으로 간주했음을 지적한다. '아랍'과 '투르크/터키'라는 오늘날의 민족적 기준에 의거하여 근대 이전 오스만 제국과 아랍 지역의 관계를 간단하게 정의하는 것은 결국 현대의 시각으로 과거를 재단하는 오류에 빠지게 마련이다. 


하지만 많은 경우에 특정한 정치적 또는 사회적 목적을 위해 역사적 기억을 이용하여 타자를 '적'으로 규정하는 과정에서는 이러한 복잡성과 다면성이 축소되고 배제된다. 400년에 가까운 오랜 시간 동안 오스만 제국과 아랍인의 관계는 다양하고 복잡한 배경 요인과 상호작용하면서 끝없이 변화해왔다. 그러나 오늘날 정치적으로 또는 사회적으로 동원되는 역사적 기억에서 양자 사이 관계가 지닌 복잡성은 대립, 종속, 착취, 억압 또는 보호, 영광, 승리라는 이분법적 구도 아래 환원되고 단순화된다. 20세기 투르크 민족주의, 아랍 민족주의와 이슬람주의의 경쟁 속에서 시작된 오스만 제국을 둘러싼 역사적 기억의 대립은 에르도안의 터키와 사우디와 UAE를 중심으로 한 아랍 국가 사이 긴장 관계가 격화되면서 다시 수면 위로 떠올랐고, 작금의 정치적 갈등 과정에서 오스만 제국의 유산을 기억하는 특정한 방식은 상대를 '적'으로 규정하고 '우리' 내부의 결속과 지지를 강화하는 수단으로 이용된다. 이처럼 한 공동체가 과거를 바라보고 기억하는 방식은 그 공동체가 놓인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문화적 배경을 반영하며 변화하고 수정되며 재해석되고 경합된다.


세 대륙을 지배하던 마지막 무슬림 제국인 오스만 제국은, 발칸과 이라크와 시리아와 카프카스를 누비던 예니체리의 군기와 시파히의 말발굽과 군악대 메흐테르의 북소리와 포병대의 포성은 이제 영원히 사라졌다. 그러나 오스만 제국을 기억하는 방식을 두고 벌어지는 대립과 논쟁은 현재의 문제다.


참고자료

Ali Adib. "Hal kana al-'uthmaniyyun sabab ta'akhkhur al-'arab? (오스만 제국이 아랍의 퇴보 원인인가?)" Raseef 22, 2018. 11. 01.

Issam Khalifah. "Salbiyyat wa ijabiyyat fi tarikh al-dawlah al-'uthmaniyyah (오스만 시대의 역사가 남긴 부정적 측면과 긍정적 측면)." Al-Sharq al-Awsat, 2019. 09. 22.

Muhammad Afifi. "Al-Tawzif al-siyasiyyi lil-tarikh al-'uthmani (오스만 제국의 역사를 정치적으로 이용하기)." Al-Sharq al-Awsat, 2019. 09. 22.

Talal ibn Khalid al-Turayfi. "Al-'uthmaniyyun ja'u ila al-watan al-'arabi bi-ra'ihat al-mawt (오스만인들은 아랍 세계에 죽음의 향기를 가져왔다)." Al-Sharq al-Awsat, 2019. 09. 22.

Tharwat al-Bitawi. "'Arab wa atrak wa 'uthmaniyyun...nabsh mustamirr fi tarikh al-ajdad (아랍인, 투르크인, 오스만인...조상들의 역사를 끝없이 파헤치기)." Raseef 22, 2018. 11. 01.

Tharwat al-Bitawi. "Al-hiqbah al-'uthmaniyyah fi bilad al-'arab...fath mubin am ghazwa athim? (오스만 제국의 아랍 지배...이슬람의 확장(fath)인가, 사악한 침공인가?)" Raseef 22, 2018. 11. 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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