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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중동

코란에서 벗어나 이슬람 극단주의 바라보기

by katib 2020. 10. 30.

<'나는 사무엘이다(Je suis Samuel)'> 

무함마드를 모독하는 만평을 수업 자료로 사용했다는 이유로 

체첸 무슬림에 살해당한 교사 사무엘 파티(Samuel Paty) 추모 집회

출처: FRANCE 24


10월 프랑스에서 전해진 테러 소식은 세계를 다시 한 번 충격에 빠뜨렸다. 표현의 자유에 관한 수업에서 『샤를리 엡도(Charlie Hebdo)』 에 실린 예언자 무함마드 풍자 만평을 소개했다는 이유로 무고한 교사가 무슬림의 손에 끔찍한 죽음을 당했고, 이어 니스의 성당에서도 아랍어로 "알라후 아크바르(Allah Akbar, الله أكبر)", '신은 위대하시다'고 외치는 무슬림의 손에 또 죄 없는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 리옹에서도 그리스 정교회 사제를 노린 총격사건이 발생했다. 한편 세계 각지의 무슬림권에서는 교사 테러 사건을 '이슬람 테러리즘'으로 규정하고 단호한 대응을 약속한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에 반발하는 목소리가 퍼져나갔다. 무슬림권 곳곳에서는 마크롱 대통령의 발언을 이슬람과 예언자, 무슬림에 대한 모독이자 반(反)이슬람 태도로 규정하고 규탄하는 시위가 발생했다. 프랑스 테러는 무슬림 이민자 유입 증가에 따른 유럽의 이슬람화(化)와 안보 불안에 대한 서구 국민의 우려를 증폭했을 뿐만 아니라 반이슬람적인 서구가 무슬림을 모독하고 위협하고 있다는 무슬림들의 피해 의식을 폭발하는 계기로 작동했다. 

프랑스 제품 보이콧 공지가 붙은 쿠웨이트의 쇼핑몰

출처: Middle East Eye


방글라데시 다카에서 열린 약 4만 명이 참여한 프랑스 규탄 시위

출처: Middle East Eye


(샤를리 엡도가 무함마드를 조롱하는 만평을 실을 자유가 있듯이 무슬림들 역시 그러한 만평을 비판하고 항의하는 시위나 보이콧에 나설 자유가 있다고 본다. 전자의 행위가 '표현의 자유'로 존중받아야 한다면 후자 역시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잡지사에 쳐들어가 직원들을 향해 총기를 난사하는 것보다야 피켓을 들고 집회에 나서는 것이 반대 의사를 드러내기에 보다 적절한 방식 아니겠는가. 물론 항의 시위가 프랑스인에 대한 습격이나 가게 약탈, 방화로 이어진다면 그 때는 더 이상 '자유'라고 부를 수 없겠지만...


아랍, 중동 그리고 이슬람을 공부하는 사람으로서 연달은 테러와 시위 소식을 접하며 그저 참담한 심정만이 들 뿐이었다. 프랑스 테러의 소식은 코로나19에 관한 뉴스만로도 이미 우울하고 착잡한 마음을 더욱 무겁게 했다. 도대체 오늘날 무슬림은 무엇이 문제인 것일까? 


개인적으로는 이슬람과 테러, 폭력, 갈등의 관계는 너무나 민감한 문제고 - 중동 무슬림권에 대한 관심이 그리 크지 않은 한국 인터넷상에서도 심심찮게 화두에 오를 정도로 -, 복잡하고 치열한 논란을 야기할 수 있는 문제를 회피하려는 경향이 강한 게으른 성격으로 인해 나는 이 주제에 대해서 의견을 드러내는 글을 쓰기를 항상 망설여왔다. 그러나 이번에는 한 번 용기를 내어 이슬람을 둘러싼 여러 논란에 대해 그동안 품어왔던 생각과 의문을 정리해서 풀어보기로 결심을 내렸다. 


무슬림들이 테러를 저지르면 인터넷 상에서는 '이슬람은 무엇이 문제인가?' '이슬람은 정말 폭력을 조장하는 종교인가?' '이슬람은 왜 세속화에 거부하는가?' '코란과 하디쓰는 정말 폭력과 갈등을 명령하는가?' 와 같은 이슬람이라는 종교에 관한 질문과 논의가 뒤따른다. 많은 사람들은 이슬람이 과연 21세기의 현대 사회에 적응할 수 있을지, 신앙과 표현의 자유, 인권, 양성평등과 같은 현대적 가치와 양립할 수 있는 종교인지 의문을 던진다. 위와 같은 논의에서는 개혁, 문명화, 세속화와 같은 이슬람의 변화가 무슬림 사이에서 만연한 종교적 광신과 극단주의, 이슬람 테러리즘을 근절하기 위한 해결책으로 흔히 거론된다. 그리고 코란과 하디쓰에서 이슬람이 현대 사회의 가치와 공존할 수 있을지, 변화와 개혁이 가능한지 그 답을 찾아내고자 한다. 이 과정에서 코란 구절이나 하디쓰의 전승은 이슬람이 본질적으로 자유와 평등, 인권과 관용과 같은 현대적 가치와는 양립할 수 없는 폭력적이고 배타적인 종교라는 주장의 근거로 해석되기도 한다.


그러나 위와 같은 논의를 접할 때마다 내게 항상 떠오르는 의문이 있다. 과연 이슬람이 개혁, 문명화, 세속화주체가 될 수 있을까?


이슬람은 의지를 지니고 움직이는 개인이 아니다. 종교로서의 이슬람은 신은 하나이시며 무함마드가 신의 예언자이고 코란이 신의 계시라는 믿음에 토대를 둔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신앙일 뿐이다. 추상과 관념의 영역에 존재하는 신앙을 실제 현실에 나타나게 만드는 매개체인 사람, 즉 이슬람을 진리로 믿고 따르는 무슬림이 없다면 이슬람은 더 이상 현존하는 종교가 아니라 고대 그리스인과 바이킹들이 지녔던 신앙처럼 문화 컨텐츠의 소재로나 활용되는 신화로나 남을 뿐이다. 이슬람의 신앙, 코란과 하디쓰의 가르침은 오직 인간이, 무슬림이 실천하고 수행할 때에야 비로소 관찰 가능한 현실에 나타나며 세계에 영향을 미친다. 무슬림 일상생활의 모든 측면을 결정하는 절대적 규범으로 흔히 알려진 이슬람법, 즉 샤리아 역시 코란과 하디쓰에 대한 무슬림들의 해석과 판단의 결과물 아니던가. 


그렇다면 더욱 적절한 질문은 '무슬림이 어떤 방식으로 이슬람을 이해하고 실천하고 있는가?'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코란은 세세한 규범을 일관되고 명확하게 지시하는 책이 아니다. 테러와 가장 직결된 비무슬림에 대한 규정만 살펴봐도 코란은 서로 모순되는 두 가지 지침을 내리고 있다. 9장 5절에서는 "다신론자를 만나는 대로 싸워라"라고 명령한다. 2장 256절에서는 "종교에는 강요가 없다"고 말한다. 무엇이 진정한 신의 뜻이며 코란의 가르침인가? 서로 상반되고 모순되는 두 계시를 무슬림은 어떻게 해석하고 실천해야 하는가? 9장 5절의 계시대로 모든 사람들이 이슬람을 받아들일 때까지 지하드를 수행해야 하는가, 아니면 2장 256절의 계시대로 종교에는 강요가 있을 수 없으니 타인의 신앙을 존중해야 하는가? 코란은 코란을 읽는 무슬림에게 이 딜레마를 해결할 수 있는 어떤 지침도 주지 않는다. 신은 코란을 계시한 뒤 다시 기약 없는 침묵에 빠졌고, 계시를 해석할 절대적 권위를 지닌 예언자 또한 더 이상 없. 코란에 가득한 모순되고 모호한 규범과 계시를 해석하고 판단하고 실천할 수 있는 규범으로 정립하는 일은 오로지 인간의 몫이다.


신의 계시와 무함마드의 전승은 오직 코란과 하디쓰를 신과 예언자의 말씀으로 인식하고 성스럽게 여기며 해석하고 판단하여 구체적인 규범을 정립하고 그에 따라 실천하는 무슬림을 통해서만 현실 세계에 영향을 끼치고 관찰 가능한 모습으로 나타날 수 있다. 우리가 쉽게 '이슬람'이라고 부르는 현상은 바로 무슬림이라는 매개체를 거쳐 여과되어 나타난 결과물이며, 따라서 어떤 해석과 판단의 과정을 거쳤는지에 따라 다양한 모습을 취하게 된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이유로 나는 아민 말루프(Amin Maalouf)의 다음 주장을 수없이 인용하고 또 인용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경전의 원문은 바뀌지 않고 우리의 시선이 바뀌는 것이다. 하지만 경전의 원문은 우리의 시선을 통해서만 세계의 현실에 대해 영향을 줄 것이다. 우리의 시선은 매 시대마다 어떤 문구들 위에서 멈출 것이며, 그리고 보지도 않고서 다른 문구들로 미끄러져 갈 것이다. 이런 이유로 기독교, 이슬람교 혹은 마르크스주의가 정말로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에 대해 물어본다는 것은 내게는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아민 말루프, 『사람 잡는 정체성, 박창호 옮김, 이론과 실천, 2006, 66쪽.

물론 코란이 다양한 해석이 가능한 열린 텍스트라고 해서 그 해석이 독자 개개인에 따라 무한히 자의적이라는 뜻은 아니다. 아무리 창의적인 독자라 하더라도 모든 사람이 신에게 복종할 때까지 싸우라든지, 여성의 상속분은 남성의 절반이라든지, 불신앙은 죄악이라는 코란의 분명한 명령에서 온전히 자유로울 수 없고 쉽게 벗어날 수 없다. 하지만 코란의 다른 해석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코란 본문에 나타나는 모순성과 모호성, 코란이 처음 계시되고 정립된 지 약 1,300년이 지나는 동안 축적되어온 다양한 해석 전통에서 그들의 독창적인 해석을 정당화할 수 있는 근거를 찾아내왔다. 코란을 통해 여성 권리 신장을 추구하는 무슬림 여성주의자들, 이슬람을 공존과 평화, 관용의 종교로 탈바꿈하려는 개혁가와 사상가들, 다양한 형태의 사회적 억압에 맞서는 인권 운동가들, 독재정권에 맞서는 민주화 운동가들 등 적지 않은 수의 무슬림들은 코란과 하디쓰를 새로운 시각으로 풀어내어 이슬람이 실천되고 수행되는 새로운 방식을 찾아내고자 노력해왔다. 


하지만 변화와 개혁의 움직임이 있다고 해서 그러한 시각이 '이슬람의 진정한 모습'이라고 생각하는 것 역시 오류일 것이다. IS와 무슬림 극단주의자들 역시 무슬림들이 쌓아온 전통을 이용해 코란에서 비무슬림에 대한 테러와 학살을 정당화하는 해석을 끌어낸다. 그들을 무슨 근거로 '이슬람의 진정한 가르침'에서 벗어났다고 단언할 수 있을까? 코란의 해석과 샤리아 규범이 다양할 수밖에 없다면 '이슬람의 진정한 가르침'이라는 것 또한 존재할 수 없는 것 아닐까? 그리고 '이슬람의 진정한 가르침'이 애시당초 존재할 수 없다면, IS의 해석이나 무슬림 개혁가의 해석이나 모두 이슬람이라는 종교가 실천되고 수행되는 방식이라고 보아야 하지 않을까? 코란이 열린 텍스트라면 자유 사상가들이 제시하는 '개혁적이고 현대화된 해석' 만큼이나 IS와 무슬림 테러리스트들이 추종하는 해석 역시 코란을 해석하는 다양한 방식 중 하나, 즉 이슬람이 현실에 나타나는 다양한 방식 중 하나라는 점을 인정해야 하지 않을까? 바로 이러한 점으로 인해 IS와 무슬림 극단주의자들의 테러 공격 역시 이슬람과 완전히 무관한 일탈이라고 치부하여 배제할 수는 없다. 코란은 무슬림 여성과 남성의 동등한 자격과 권리를 주장하는 근거를 제공하는 방향으로 해석될 수 있는 동시에 무고한 학교 교사와 성당에서 기도하는 민간인 살해를 정당화하는 방향으로도 해석될 수 있다. 두 방향 모두 이슬람이 현실에 나타나는 여러 모습일 뿐, 어느 하나가 '진정한' 형태고 다른 하나가 '왜곡된' 형태라고는 할 수 없다. 테러를 포함하여 극단주의, 비무슬림과 여성, 성소수자에 대한 차별과 탄압, 표현과 신앙의 자유에 대한 억압 등 무슬림이 다수인 사회에서 나타나는 여러 현상 또한 코란과 하디쓰, 해석 전통을 통해 정당화된다는 점에서 이슬람이라는 종교와 떼어놓을 수 없는 관계를 맺고 있다. 


그렇기에 나는 이슬람의 진정한 가르침이 무엇이고 이슬람의 본질이 무엇인지 찾아내기 위해 코란과 하디쓰에 매달리는 일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슬람에서 벗어나 무슬림으로 우리의 시각을 돌려야 한다고 생각한다. 코란과 하디쓰에 무엇이라고 쓰여있는지를 따지기보다 오늘날 무슬림들은 코란과 하디쓰를 어떤 식으로 해석하고 어떤 규범을 도출하고 있으며, 왜 코란과 하디쓰에 대한 개방적이고 개혁적인 해석이 많은 무슬림 사이에서 지지와 호응을 얻지 못하는지를 물어야 한다. 우리의 관심사를 코란과 하디쓰에 쓰인 구절에서 코란과 하디쓰를 읽고 실천하는 무슬림으로 돌린다면 우리가 살펴야 할 요인은 더욱 많아진다. 무슬림들은 이슬람을 믿는 '무슬림'인 동시에 걸프 부국 국민이거나 개발도상국 국민일 수도, 성공한 이민자 2세이거나 하층민 이민자 2세일수도 있다. 무슬림은 또한 직업인이거나 실업자며, 무학자거나 고학력자이며, 남성이거나 여성이며, 노인이거나 청년이며, 도시 출신이거나 시골 출신이며, 부유층일수도 중산층일수도 저소득층일수도 있다. 카이로 빈민가에 살며 하루 벌어 하루 겨우 먹고 사는 한 가정의 가장과 1년 등록금이 한국 대학 등록금보다 비싼 AUC(American University in Cairo)에 다니는 부유층 청년 대학생이 단순히 무슬림이라는 이유로 하나의 집단으로 정의될 수 있을까? 같은 무슬림이라 하더라도 이 두 사람이 같은 관점에서 코란을 바라볼까? 


무슬림들은 왜 테러를 저지를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은 단순히 '코란에 비무슬림에 대한 폭력을 정당화하는 구절이 있기 때문에'라는 선언만으로는 풀릴 수 없다. 모든 무슬림이 테러리스트도 아니고, 모든 테러리스트가 무슬림도 아니다(최근 몇 년 사이 미국에서 발생한 총기난사사건을 일으킨 극우파들이나 교사 참수 사건 이후 에펠탑 근처에서 "더러운 아랍인"이라고 외치며 알제리계 무슬림에게 칼을 휘두른 프랑스 여성들은 확실히 무슬림이 아니다). 하지만 분명히 무슬림 테러리스트는 존재하며 이는 무슬림권에서 일어나는 여성 차별과 명예 살인과 같은 다양한 악폐습과 마찬가지로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다. 또한 코란 구절과 이슬람 전통 내에 존재하는 타 종교인에 대한 증오와 폭력을 선동하는 담론은 폭력을 정당화한다는 점에서 무슬림을 테러리스트로 만드는 중요한 요인 중 하나라는 점 또한 부정할 수 없다. 하지만 이에 그치지 않고 왜 지금까지 폭력과 증오의 담론이 여전히 무슬림 사이에서 호소력을 발휘하는지, 왜 여전히 적지 않은 무슬림들이 관용과 평화를 지향하는 해석이 아니라 증오와 갈등을 조장하는 해석을 지지하는지 또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슬람은 종교개혁이 필요하다'라는 주장을 쉽게 찾아볼 수 있지만, 서구 기독교권의 종교개혁과 세속화는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격변 속에 살고 있던 기독교도들이 성경을 새롭게 읽기 시작하면서 나타난 변화였지 성경 구절이 바뀌거나 그동안 없던 성경 구절이 갑자기 나타나거나 어느날 교황이 느닷없이 각성해서 발생한 변화가 아니었다. 기독교권의 변화를 가져온 주체는 기독교 신앙을 가지고 실천하는 사람들, 즉 기독교도였다. 서구 기독교권의 변화는 성경 내부가 아닌 성경 외부에서 시작되었다. 그렇다면 무슬림들이 코란을 읽고 해석하는 실천하는 방식 역시 그들이 살고 있는 특정한 시대적 환경의 산물로 보고 무슬림 사회 내에서 새로운 종교적 담론이 큰 파급력을 가지지 못한 요인 또한 코란 내부가 아닌 코란 외부, 이슬람이라는 객체가 아닌 무슬림이라는 주체, 그리고 무슬림들이 살고 있는 사회에서 그 답을 찾아야 할 것이다.  


테러, 극단화, 가치관의 충돌, 세속화에 대한 거부, 여전히 강력하게 작동하는 종교적 보수성과 같은 오늘날 무슬림 사회에서 나타나는 여러 현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오늘날 그들이 처한 사회경제적 환경, 정치적 상황, 역사적 배경과 개인적 요인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요인에 대한 다각적이고 폭넓은 분석을 필요로 한다. 그런 뒤에야 왜 코란과 하디쓰에서 증오와 분노와 적의와 폭력을 도출하는 해석이 여전히 무슬림 사이에서 널리 퍼져 있는지, 왜 무슬림 내에서 개혁과 변화와 인권의 목소리가 아직 힘을 얻지 못하는지를 말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정확히 어떤 요인이 어떻게 무슬림의 극단화를 촉발했는지 설명하기에는 여전히 공부하고 고민해야 할 것이 많다. 그러나 한가지는 확신할 수 있다. 코란과 하디쓰에만 매몰되어서는 그 답을 찾아낼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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