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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사

용맹한 야만인 또는 잔혹한 압제자: 아랍인들의 투르크인 인식 변화

by katib 2019. 12. 18.

지난 글에서 간략하게 보았듯이 오늘날 아랍 지식인과 정치인 사이에서 오스만 제국을 압제와 착취, 아랍의 퇴보와 정체의 원인으로 간주하는 해석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아랍인의 세력이 중앙아시아까지 침투하고 투르크인 유목민과 조우한 7세기 그리고 투르크인 노예 군인들이 압바스 조의 실권을 장악하기 시작한 9세기 이후 투르크인 그리고 오스만 제국에 대한 아랍인들의 시각은 여러 변화를 겪어왔다. 아랍인과 페르시아인에 이어 투르크인들이 중동 무슬림권의 주요 행위자로 자리잡은 이래 아랍인이 투르크인을 바라보던 방식은 투르크인을 바라보는 시각은 투르크인과 아랍인 사이의 권력 관계에 결부되어 변화했다. 특히 칼리프의 노예 군인로 무슬림권에 진입한 투르크인들이 결국 압바스 조의 그들의 칼리프를 허수아비로 만들고 무슬림권의 지배권을 아랍인의 손에서 빼앗아 온 이후 셀주크 조, 맘루크 조, 그리고 오스만 제국에 이르기까지 거의 천 년의 세월 동안 투르크인 왕조가 중동의 정치적 지배자로 군림하면서 아랍인들은 지배자에서 피지배자로 전락했고, 이러한 상황은 투르크인에 대한 아랍인의 시각과 인식 그리고 고정관념의 형성에 영향을 주었다. 두 집단 사이의 권력 관계의 변화와 심대한 파급력을 지니는 정치적 사건의 발생에 따라 아랍인은 투르크인을 때로는 "확고한 신앙심으로 이슬람을 지키는 용맹한 전사"로 때로는 "난폭하고 무례한 야만인"로 그려냈고, 오늘날 아랍인들이 오스만 제국을 기억하는 방식 역시 투르크인에 대해 그들이 가져온 오랜 고정관념의 역사의 한 부분이다.


울리히 하르만(Ulrich Haarmann)이 지적하듯이 타 집단에 대한 편견과 고정관념은 특정한 정치적, 사회적, 문화적 상황을 반영할 뿐만 아니라 다른 집단에 대한 차별을 정당화하고 합리화한다. 또한 타 집단에 대한 편견과 고정관념을 유지하고 재생산하는 조건이 장기적으로 유지될 경우 편견은 이제 일종의 '사실'로 자리잡아 독자적인 생명력을 지니게 된다. 사람들의 인식에 깊게 자리잡아 고착화된 편견과 고정관념은 최초로 형성된 조건과 환경이 변화한 뒤에도 여전히 살아남아 영향력을 행사하고 사람들의 시각을 지배한다. 이 상황에 이르면 이제 굳게 자리잡은 편견과 고정관념에 끼워 맞추어 현실이 재해석된다. 집단 구성원의 행위는 그 집단에 부여된 특정한 특성과 고정관념에 따라 해석되고 설명된다.[각주:1] 우리가 쉽게 이해할 수 없는 중동 사람들의 모든 행위는 장사꾼, 유목민, 그리고 무슬림이라는 하나의 고정적이고 본질적인 특성에 따라 해석된다. 심지어 한국 수출업체에 대한 중동 바이어의 갑질과 시간끌기와 간보기, 중동 국가의 축구팀이 우리와의 축구 경기에서 한 골을 넣고 드러눕고 골대 앞에 버스를 세우는 '침대 축구'까지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이윤을 창출"하는 중동의 '상인 문화'가 "축구에서도 과정보다 승패에 더 집착"하는 행위로 나타나는 결과 또는 "율법과 규율에 어긋나지 않으면 남의 시선을 개의치 않으며 자신이 아쉬운 상황이 아니라면 좀처럼 먼저 움직이지도 않는" 문화인 "이슬람 문화"의 결과로 해석된다(아랍 및 이슬람의 어떤 본질적인 문화의 존재를 상정하고 침대 축구를 해석하는 아랍어과 교수들과 중동 축구의 구조적인 문제를 근본적 원인으로 지목하는 축구 전문가들의 시각과 접근 방식, 분석의 차이가 흥미롭다).


투르크인에 대한 아랍인들의 고정관념과 편견 역시 우리가 중동 사람들에 대해 지니는 고정관념과 유사하다. 우리가 중동의 아랍인과 이란인(페르시아인)과 터키인를 서로 거의 비슷한 집단 또는 같은 집단으로 여기듯이 아랍인들 역시 자신들과는 다른 다양한 집단 - 투르크계에 속하지 않는 카프카스의 체르케스인이나 아브하즈인, 슬라브계인 보스니아인, 심지어 인도 힌두교도와 발칸 기독교도까지 - 을 '투르크인(al-Turk, 복수형은 al-Atrak)'이라는 이름표로 분류했다. 아랍인들은 실제 투르크인이라 하더라도 계급적, 사회적 차이를 인식하지 않았고, 교양과 학문 수준이 높은 지식인이든 일자무식 농민이나 유목민 모두 '투르크인'이라는 하나의 동질적인 집단에 속한 것으로 간주하여 '투르크인'이라는 집단 전체에 부여된 고정관념과 편견을 그 집단에 속한 것으로 규정된 개인에게 그대로 적용했다.[각주:2] 비록 투르크인에 부여된 고정관념적 특성은 시대에 따라 달라졌어도 그 편견의 존재만큼은 역사적으로 일관되게 유지되었다.


1. 압바스 시대 아랍인들의 투르크인 인식: 무시무시하면서도 용맹한 야만인, 최후심판의 징조

위에서 언급했듯이 9세기 압바스 조의 칼리프 알 무으타심(Al-Mu'tasim, 재위 833-842)이 투르크 노예로 구성된 군대를 구성하고 투르크 노예군에 강력한 힘을 실어주기 시작한 때부터 투르크인들은 점차 중동 무슬림권의 권력을 장악하기 시작했다. 수도를 바그다드에서 사마라(Samarra)로 옮겨 강성해지는 투르크 군대의 힘을 견제하고자 한 칼리프 알 무타왁킬(Al-Mutawakkil, 재위 847-861)이 투르크 병사들의 손에 암살당하면서 "신자들의 지도자(Amir al-Mu'minin)"로서 무슬림 공동체의 최고 통치자로서 압바스 칼리프의 권위와 권력은 땅에 떨어졌다. 알 무타왁킬 사망 이후 870년 알 무으타미드(Al-Mu'tamid, 재위 870-892)가 즉위하기까지 9년 간 5명의 칼리프가 즉위했고 그 중 3명이 투르크 병사들에게 비참하게 살해당했다. 투르크 병사들은 사면을 약속한 알 무스타인(Al-Musta'in, 재위 862-866)의 머리를 잘라 그의 시체를 길거리에 묻었고 알 무으탓즈(Al-Mu'tazz, 재위 866-869)는 중동의 작열하는 태양볕 아래 서 있는 고문을 당한 뒤 작은 독방에 갇혀 살해했다. 알 무흐타디(Al-Muhtadi, 재위 869-870)는 사마라 시내를 뛰어다니며 시민들에게 투르크인들에게서 칼리프를 지켜달라고 호소하다가 결국 살해당했다.[각주:3] 9세기 이후 압바스 칼리프는 투르크 군벌들이 내키면 갈아치우는 허수아비로 전락했다.


<6-8세기 중앙아시아 초원의 투르크인들>

출처: Antony Karasulas. Mounted Archers of the Steppe 600 BC-AD 1300 (London: Osprey Publishing, 2004).


압바스 시대의 이러한 정치적 격변은 투르크인을 "야만인"으로 바라보는 아랍인의 시각에도 나타난다. 동시대에 살았던 시인인 이븐 란카크 알 바스리(Ibn Lankak al-Basri, 912/913년 사망)는 다음과 같이 노래했다.[각주:4]


이제 더 이상 자유는 없다네. 자유는 빼앗기고 유린되었네. 

시간이 나를 '야만인들' 한가운데 버려두었네. 

사람들은 말하지, '자네는 집에만 처박혀 있구만'

그러면 나는 대답한다네, '더 이상 길을 다니는 것이 즐겁지 않다네

내가 길에서 만나는 이들이 누구인가? 말을 탄 원숭이들이지!'

알 바스리보다 후대에 활동한 압바스 시대의 대표 시인인 알 무타납비(Al-Mutanabbi, 965년 사망)의 시에 나타나는 "주인을 노예로 만든 자"라는 언급 역시 한때 노예인 집단에게 권력을 빼앗긴 아랍인들의 심성을 반영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각주:5]


그러나 투르크인을 '야만인'으로 규정한 압바스 시대 아랍인들의 시각이 항상 부정적인 의미만을 지닌 것은 아니었으며, 투르크인에 부과된 '야만인'이라는 꼬리표는 이들이 거칠고 무례하며 오만한 무리라고 비난하는 동시에 신앙심이 깊고 어려움에 굴하지 않는 용감한 전사들이라는 의미 또한 담고 있었다고 하르만은 지적한다. 한 예로 압바스 시대의 뛰어난 작가이자 문필가인 알 자히즈(Al-Jahiz, 868/869년 사망)는 투르크인들이 오만하고 야만적이지만 충성스럽고 신실한, 마치 이슬람 이전 아라비아의 베두윈들이 그러했듯이 순수하고 자유로우며 독립적인 사람들로 그려낸다.[각주:6]


압바스 시대 아랍인들은 또한 투르크인이 세계의 변방에 놓인 춥고 습한 지역에서 온 난폭하며 호전적이고 무시무시한 야만인으로 바라보았다. 이러한 인식은 예언자 무함마드가 남겼다는 "투르크인들이 그대들을 가만히 내버려둔다면 그대들도 그들을 내버려두라(utrukū al-Atrāk mā tarakūkum)," "투르크인이 그대를 좋아한다면 그대를 잡아먹을 것이고, 그대에게 화가 난다면 그대를 죽일 것이다(in aḥabbuka akalūka, in ghaḍibūka qatalūka)" 등의 하디쓰에서도 나타난다.[각주:7] 오늘날 많은 학자들은 예언자 무함마드의 하디쓰 상당수는 실제 무함마드가 남긴 말이 아닌 하디쓰를 기록하고 정리한  8-10세기 압바스 시대 무슬림 학자들의 시선이 상당 부분 반영되어 구성된 결과물임을 지적하며, 투르크인에 대한 이러한 하디쓰 역시 압바스 시대 아랍 지식인들이 투르크인에 대해 가진 인식의 결과물이다(7세기 아라비아 서부에 살던 예언자 무함마드가 실제 투르크인을 만나보았을지는 의심스럽다).


더 나아가 투르크인은 최후심판의 징조로 여겨졌다. 무함마드의 하디쓰에는 최후심판이 일어나기에 앞서 "사람의 머리카락으로 만든 신발을 신고 작은 눈에 코가 평평한 투르크인"의 침공이 있을 것이라는 예언이 실려 있으며, 투르크인은 코란에 나오는 곡(Gog)과 마곡(Magog)의 사람들, 즉 알렉산드로스(이스칸다르)가 세운 성벽 너머에 있는 동방의 무시무시한 야만인들로 간주되었다. 13세기의 이븐 알 나피스(Ibn al-Nafis, 1288년 사망)는 동방의 투르크인들이 올바른 이슬람의 가르침을 벗어난 무슬림을 벌하기 위한 "신의 징벌"이라고 인식했다.[각주:8]


그러나 하르만은 압바스 시대까지 투르크인의 정치적 권력 강화가 아직 이슬람과 결부된 아랍인의 특수한 지위를 위협하는 수준에는 이르지 못했음을 지적한다. 아랍인은 신이 그의 마지막 예언자를 보내기 위해 선택한 민족이었으며 아랍어는 신이 마지막 계시를 전달하기 위해 선택한 언어였다. 초원에서 온 야만인들이 얼마나 무시무시하든, 그들의 권력이 얼마나 강고하든 이슬람의 가르침을 최초로 받은 민족으로서 아랍인이 지닌 종교적 권위는 흔들리지 않았다.[각주:9]


2. 셀주크 시대와 맘루크 시대: "투르크인에게서 무얼 기대하겠는가?"

아랍인들이 독점하던 종교적 권위와 특수한 지위는 그러나 11세기 투르크 왕조인 셀주크 조가 세워지면서 흔들리기 시작했다. 꾸라이쉬 부족의 아랍인 통치자인 압바스 칼리프는 셀주크 술탄의 권위를 추인하는 상징적 존재로 전락했고 셀주크 술탄과 니잠 알 물크(Nizam al-Mulk)와 같은 고위 관료는 아랍인 법학자들에 대한 후원과 보호를 통해 그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하는 한편 독자적인 종교적 권위를 확립해나가기 시작했다. 하르만은 셀주크 시대 들어 압바스 칼리프로 대표되는 아랍인의 종교적 영역에 대한 독점적 지위와 권위가 위협받기 시작하면서 점차 아랍인 학자들 사이에서 위기의식이 고조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런 상황에서도 셀주크 술탄 투그릴 벡(Tughril Beg, 재위 1037-1063) 밑에서 재상을 지냈던 이븐 핫술(Ibn Hassul, 1058년 사망)과 같이 투르크인을 용맹하고 강인하며 통치에 적합한 민족이자 투그를 벡을 "이슬람의 구원자"로 묘사한 아랍인이 없던 것은 아니었다.[각주:10] 이처럼 투르크인에 대한 시각은 아랍인과 투르크인 사이의 전체적인 권력관계 뿐만 아니라 서술자 개인이 투르크인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느냐에 따라서도 결정되었다.


<맘루크 기병들>

출처: David Nicolle. The Mamluks 1250-1517 (London: Osprey Publishing, 1993).


투르크인에 대한 아랍인들의 부정적 시각은 그러나 13세기 몽골 침공과 십자군 전쟁 시기 다소 완화되었다. 1258년 훌라구(Hulagu)가 이끄는 몽골군이 바그다드를 점령하여 압바스 조의 마지막 칼리프 알 무스타으심(Al-Musta'sim, 재위 1242-1258)을 살해하면서 압바스 조는 무너졌다. 서쪽에서 온 십자군의 침공에 직면한 아랍 무슬림에게 동방에서 새롭게 등장한 몽골인은 실로 신의 재앙이자 이슬람의 멸망이 도래하는 기분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절망적인 상황에서 무슬림권을 구한 것은 바로 투르크인인 이집트의 맘루크(Mamluk)들이었다. 1260년 아인 잘루트(Ayn Jalut) 전투에서 몽골군을 격파한 이집트의 맘루크들은 1291년에는 십자군의 마지막 근거지인 아크레(Acre)까지 함락하면서 두 방향에서 몰려든 침략자 모두를 격퇴하는 데 성공했다. 자연스럽게 투르크인을 '이슬람을 지키는 용맹한 구원자'로 여기는 평가가 뒤따랐다. 아크레가 함락한 이후 아부 샤마(Abu Shama, 1267년 사망)는 다음과 같은 시를 지어 맘루크 술탄 알 아슈라프 칼릴(Al-Ashraf Khalil, 재위 1290-1293)에게 아래와 같은 시를 바치며 찬양했다.[각주:11]


신께 찬미 있으라, 십자가의 왕국이 무너졌도다.

투르크인들을 통해 선택받은 아랍인의 종교가 승리했도다.

맘루크 술탄이 지배하는 이집트에서 법관을 지내기도 한 이븐 칼둔(Ibn Khaldun, 1406년 사망) 또한 투르크인을 "유목민의 덕성을 지닌 진정한 신앙을 지닌 무슬림"이라고 평가하며 투르크인의 지배를 아랍인이 거쳐야 할 역사적 변화 단계의 자연스러운 한 과정으로 이해했다. 15세기의 학자인 아부 하미드 알 꾸드시(Abu Hamid al-Qudsi) 또한 맘루크들이 가져온 이집트의 안정과 평화, 번영은 투르크인들이 지닌 정직성과 희생정신의 결과라고 주장하기도 했다.[각주:12]


그러나 하르만이 지적하듯이 이븐 칼둔이나 알 꾸드시의 시각은 맘루크 지배에 놓인 이집트 아랍 학자들의 보편적이고 일반적인 시각은 아니었다. 아인 잘루트와 십자군 전쟁의 승리에 대한 기억이 희미해지면서 아랍인들은 한때 그들의 노예였던 이방인들, 그것도 코란의 언어인 아랍어조차 제대로 말하지 못하며 신이 계시한 올바른 이슬람법이 아닌 자신들만의 관습에 따라 통치하는 정복자의 지배를 받고 있다는 사실을 점차 고통스럽게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권력을 잡고 있는 맘루크에 대한 아랍인 종교학자와 법학자들의 반감은 "야만인 투르크인"이라는 고전적인 고정관념과 편견을 다시 되살리는 방식으로 나타났다고 하르만은 설명한다. 알 사카위(Al-Sakhawi, 1497년 사망)는 맘루크 혈통을 지닌 역사가 이븐 타그리비르디(Ibn Taghribirdi, 1470년 사망)의 저작을 보잘 것 없는 것으로 치부했다. 맘루크 시대 아랍 지식인들은 "아랍인과 달리 미신을 잘 믿는" 맘루크 투르크인을 비웃었고 투르크 혈통을 지닌 학자에 대해서는 "그는 악한이고 난폭했으며 잔인했고 교활했지만 놀랍게도 아랍어와 학문에 뛰어났다" 평가했으며 예수를 가리켜 사람들이 "나자렛에서 무슨 좋은 것이 나오겠느냐?"하고 물었듯이 "투르크인에게 무엇을 기대하겠는가?"라고 물었다.[각주:13] 


이러한 편견은 맘루크 이집트의 아랍인 학자들이 맘루크들의 후손, 즉 투르크인의 후손들이 종교학과 법학과 같은 아랍인의 전유물로 여겨지는 이슬람 관련 학문 분야에 진출하는 것을 막고 방해하는 이유가 되었다. 아랍인 종교학자와 법학자들에게 학문 영역에서 투르크인 또는 그들의 후손의 진입 차단은 투르크인의 정치적 권력에 대항하여 아랍인의 종교적 권위와 특수한 지위를 지켜내기 위한 일종의 방어적 행위다고 하르만은 설명한다.[각주:14] 


한편 대중적 차원에서 투르크인에 대한 시각은 식자층과 다소 괴리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하르만은 투르크인에 위협을 느낀 식자층의 편견과 고정관념과는 다르게 맘루크의 지배가 가져온 평화와 안정을 반갑게 여기던 대중 사이에서는 "투르크인의 폭정이 아랍인의 "정의"보다 낫다 (ẓulm al-turk wa-la 'adl al-'arab)"라는 인식이 존재했다고 지적한다. 그러나 이집트가 오스만의 지배 아래 들어간 이후, 투르크인에 대한 부정적 고정관념과 편견, 인식은 대중적 차원에서도 확산되기 시작했다.


3. 오스만 시대: 아랍인의 마지막 보루의 함락

1517년 오스만 제국이 맘루크 조를 무너뜨리고 이집트를 점령하면서 아랍 지역에서 투르크인과 아랍인의 관계는 다시 변화하기 시작했다. 맘루크 조는 투르크인의 왕조였어도 이집트를 중심으로 하는, 카이로가 수도인 국가였다. 그러나 오스만 지배 아래에서 이집트는 중심부의 위치를 상실하고 이스탄불의 통제를 받는 하나의 지방으로 전락했다. 뿐만 아니라 오스만 지배 아래에서는 맘루크 시대까지 아랍인 지식인들이 지켜왔던 마지막 보루인 종교계까지 투르크인의 지배 아래 잠식되기 시작했다. 맘루크 술탄들이 상징적으로 세운 압바스 조의 칼리프는 이스탄불로 송환되어 술탄 셀림 1세(Selim I)에게 칼리프위를 선양하고 역사에서 사라졌으며, 이스탄불 중앙정부는 맘루크 시대에도 아랍인 순니 샤피이(Shafi'i) 법관이 담당하던 수석 법관(qadi al-qudat)에 순니 하나피(Hanafi) 법학파를 따르는 투르크인을 임명하여 종교계까지 직접 통제 아래 넣었다.[각주:15] 


오스만 지배는 또한 식자층이 지니던 투르크인에 대한 편견과 고정관념, 반감을 일반 대중 사이로 확산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18세기 투르크인 군사 엘리트와 아랍 대상인, 투르크인 하급 병사와 현지의 아랍인 상공업자 사이의 경계와 구분이 점차 약화되고 투르크인이 이집트 경제와 사회로 더욱 깊숙히 침투하기 시작하면서 지배자와 피지배자로 철저히 구분되던 투르크인과 이집트 아랍인의 관계는 경제적 이익을 둘러싸고 상호 경쟁하는 관계로 바뀌었다. 그 결과 아랍인 식자층에서 처음 구성된 "야만인 투르크인"이라는 고정관념과 편견이 투르크인 상공업자와 같은 영역에서 경쟁하게 된 아랍인 일반 대중 사이에서도 확산되었고 투르크인의 야만성과 잔혹함, 무자비함과 비인간적 특징을 강조하는 "투르크인은 뇌가 없는 짐승 (al-atrāḥayawān min ghayr idrāk)"이라는 표현까지 통용되기 시작했다.[각주:16] 투르크의 지배가 정치적 영역을 넘어 종교적, 사회적, 경제적 영역까지 확대되며 더욱 고조된 투르크인에 대한 아랍인의 반감은 투르크인을 규정하던 전통적인 편견과 고정관념을 더욱 심화시켰다. 압바스 시대와 셀주크, 맘루크 시대까지 용맹함, 순수함, 자유로움, 강인함, 굳건한 신앙심의 의미도 지니던 "야만인 투르크인"이라는 인식은 오스만 시대 이후 투르크인의 폭력성, 강압성, 잔혹함만을 강조하는 완전히 부정적인 의미로 자리잡았다.


4. 20세기: 아랍 민족주의의 부상과 "압제자 투르크인"

19세기 이후 아랍 지역에 확산되기 시작한 민족주의는 압바스 시대부터 형성되어오던 투르크인에 대한 아랍인들의 고정관념과 편견을 다시 한번 근본적으로 변화시켰다. 리파아트 알리 아불 하즈(Rifaat Ali Abou-el-Haj)는 19세기와 20세기에 걸쳐 오스만 제국에 대한 아랍인들의 인식 변화를 분석한다. 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오스만 제국이 해체된 1918년까지 아랍 지식인들은 오스만 제국을 술탄-칼리프가 통치하는 이슬람 제국으로 인식했고 따라서 오스만 제국은 서구와 외세의 침입으로부터 이슬람과 무슬림을 보호하는 보호자이자 마지막 방파제로서 긍정적으로 여겨졌다.[각주:17] 19세기 성장한 발칸 기독교도 집단의 분리주의운동에 대응하여 이슬람을 토대로 제국 내 아랍인과 투르크인 무슬림을 결속하는 오스만 정체성을 형성하고자 한 술탄 압둘 하미드 2세(Abdul Hamid II, 재위 1876-1909)와 청년 투르크당(Young Turks)의 범이슬람주의와 범오스만주의 정책이 오스만 제국에 대한 아랍 지식인들의 긍정적인 시각에 일정 정도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각주:18]


<선전 포스터 - 오스만을 과거의 쇠사슬에서 해방하는 청년 투르크당>

출처: https://en.wikipedia.org/wiki/Young_Turks


그러나 1910년대 후반부터 아랍 지식인들의 자기 정체성 인식은 점차 오스만 제국과 분리되기 시작했다. 이는 민족주의 이념의 확산 결과이자 동시에 1910년대 청년 투르크당 지도자들이 추진했던 투르크화(Turkfication) 정책의 결과였다아랍인들의 교육 과정에서 터키어 사용을 강제하고 터키어를 국가행정의 공식 언어로 규정하여 아랍인들에게도 터키어를 강제로 주입하고자 한 청년 투르크당 지도자들의 정책은 아랍 지식인들의 반발을 가져왔고 아랍인과 투르크인 사이의 차이를 더욱 부각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투르크화 정책에 대한 반발로 아랍 지식인 사이에서는 문어체 아랍어를 증진하고 지켜내려는 운동이 성장했고, 이 과정에서 아랍인은 코란의 언어인 하나의 문어체 아랍어로 결속된 하나의 민족이라는 인식이 더욱 구체적으로 성장하기 시작했다.[각주:19] 종교가 아닌 언어가 집단과 집단을 구분하는 중요한 기준으로 자리잡으면서 이제 아랍인과 투르크인은 같은 무슬림 공동체가 아닌 서로 다른 민족으로 재정의되었고, 오스만 제국의 아랍 지배 또한 무슬림의 단결이 아닌 외부인의 지배와 억압으로 규정되었다.


오스만 제국이 붕괴한 이후 나타난 신생 아랍 국민국가는 구성원에게 오스만 제국의 무슬림 신민이 아닌 새로운 아랍 국민국가의 아랍 국민이라는 정체성을 부여하는 작업을 시작했다. 새롭게 그러나 서구 열강에 의해 어느 정도는 인공적으로 형성된 국민국가는 자신들의 존립 근거를 정당화하기 위해 국민국가의 역사적 기원이 실제 국가 형성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는 역사적 기억을 구성했다. 이러한 역사적 기억에서 아랍 국민국가의 지배 엘리트들은 이라크, 이집트, 시리아와 같은 국가들이 아무런 역사적 근거도 없이 20세기 초반에 갑자기 지도 위에 나타난 신생국가가 아니라 오스만 제국 이전부터 존재해오던 분명한 실체며, 과거 특정한 지리적 영역을 말하던 시리아, 이라크, 이집트와 같은 표현은 이제 국민국가와 동일시되는 개념이자 현대 국민국가가 과거부터 존재해왔음을 입증하는 역사적 증거로 제시되었다. 이처럼 새롭게 나타난 아랍 민족주의적 시각과 역사적 기억에서 오스만 제국은 오랜 과거부터 분명하고 고유한 민족 정체성을 지녀온 아랍 민족을 부당하게 지배하고 착취하며 그들의 정체성과 문화를 억압하고 아랍인들의 쇠퇴와 퇴보를 가져온 '압제자 투르크인'으로 규정되기에 이르렀다.[각주:20] "이중의 제국주의(double imperialism)," 즉 아랍인들은 유럽 열강의 식민지가 되기 전에 이미 오스만 제국의 가혹하고 억압적인 식민 지배 아래에서 신음했으며 오스만 제국은 프랑스나 영국과 같은 유럽 열강과 마찬가지로 아랍인을 식민지화한 제국주의적 지배자였다는 기억과 시각은 아랍 민족주의에 따라 새로운 국민국가 정체성을 정의하는 중요한 요소로 자리잡았다.[각주:21]


뿐만 아니라 오스만 제국을 부정하고 매도하는 역사적 기억은 신생 아랍 국가의 지배 엘리트들이 자신들의 '부끄러운' 과거를 은폐하기 위한 목적 또한 지니고 있었다. 새로운 국가의 '아랍' 지배자들은 불과 몇 년 전만 하더라도 오스만 제국의 엘리트층이자 관료, 군인, 정치인, 지식인들이었다. 한 예로 프랑스 보호령 시절 시리아 국가 수반이었던 수브히 바라카트(Subhi Barakat)와 다른 고위 정치인들은 아랍어를 거의 말하지 못했고 결국 알레포 의회는 터키어를 공식 언어 중 하나로 지정해야 하던 상황일 정도였다.[각주:22] 오스만 제국 시대와의 단절은 과거 오스만 제국의 지배 엘리트의 일원이었던 새로운 지배 엘리트들이 오스만 제국을 버리고 서구라는 또다른 외세에 협조해서 새로운 국가의 정치적 권력을 얻었다는 불편한 과거를 은폐하고 제국주의에 맞서 아랍인들의 궁극적이고 완전한 독립을 추구하는 선봉을 자처하며 자신들의 권력을 정당화하기 위한 수단의 하나였다고 아불 하즈는 지적한다.[각주:23]


오스만인과 투르크인을 비문명적인 폭군 또는 잔혹한 압제자로 바라보고 오스만 시대를 끝없는 침체와 쇠퇴로 보는 시각은 아랍 국가가 독립하고 아랍 민족주의가 정점에 달한 1950년대와 60년대, 70년대까지 이어졌다. 1950년대 후반 '폭군(tyrant)'라는 단어가 페르시아어에서 투르크인을 가리키던 단어인 투란(Tūrān)에서 유래되었다고 주장한 칼리드 무함마드 칼리드(Khalid Muhammad Khalid), 오스만 제국의 이집트 지배가 이집트 및 아랍 지역의 경제적 침체로 인한 문화적, 학문적 쇠퇴를 반전할 어떤 자극이나 변화, 긍정적인 변화도 가져오지 못했다는 1960년대 이집트 역사가 무함마드 아니스(Muhammad Anis)의 분석 그리고 투르크인은 문화도 역사도 정체성도 없는 야만인 집단이라고 언급한 이집트의 문화지리학자 가말 함단(Gamal Hamdan)가 1970년대에 제시한 주장은 이러한 시각을 반영한다.[각주:24]


아랍 민족주의의 등장, 신생 아랍 국민국가의 존립 정당화를 위한 국민국가 정체성 형성 필요성, 오스만 제국과의 단절을 통해 자신들의 권력을 정당화하고자 한 새로운 아랍 정치 엘리트들의 시도 와 같은 20세기 초의 상황 변화는 압바스 시대부터 아랍 지식인 내에서 존재하던 투르크인에 대한 편견과 고정관념을 재확인하고 재생산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야만인 투르크인'이라는 전통적인 고정 관념은 투르크인을 본질적으로 지적 활동과 고등 문화에는 어울리지 않는 집단으로 규정하던 맘루크 시대의 인식을 거쳐 20세기 오스만 제국을 전제적이고 무자비한 식민 지배세력이자 아랍 지역의 쇠퇴와 침체의 궁극적 요인으로 지목하는 시각까지 변화해왔다. 그리고 21세기 오늘날에도 투르크인과 오스만 제국에 대한 아랍인들의 이러한 뿌리깊은 고정관념과 부정적 편견은 '아랍의 봄' 이후 레젭 타입 에르도안 터키 대통령이 적극적으로 추진하는 중동 내 터키의 영향력 확대를 위한 외교 정책에 대응하기 위해 다시 기억에서 현재로 소환되었다. 2013년 압둘 팟타흐 알 시시(Abd al-Fattah al-Sisi) 이집트 대통령이 터키와 가깝던 이집트의 무슬림형제단 정권을 쿠데타로 무너뜨리고 집권한 이후 이집트와 터키의 외교관계는 경색되었고, 이러한 상황 속에서 2018년 2월 이집트 카이로 당국은 엘 제이툰(El-Zaytoun) 구역의 술탄 셀림 1세 거리의 도로명을 바꿀 계획을 발표했다. 


<이집트 카이로의 "셀림 1세 거리" 표지판>


그러나 당국과 지식인들이 제시한 도로명 변경 이유는 현재의 이집트와 터키의 경색된 외교관계가 아니었다. "이집트를 침략하여 조국을 지키고자 한 이집트인 수천 명을 살해한 뒤 400년 동안 지배"한 인물의 이름을 카이로의 도로명으로 써서는 안된다고 주장한 헬완 대학교 현대사 교수인 무함마드 사브리 앗 달리(Muhammad Sabri al-Dali), 그리고 "이집트를 정복하고 그 주민을 살해한 정복자의 이름을 거리에 붙인 과거의 실수를 바로잡기 위한 행동"이라고 분석한 헬완 대학교의 다른 현대사 교수인 아심 앗 두수키(Asim al-Dusuqi) 교수 - 이 인물은 지난 글에도 등장한 바 있다 - 와 같이, 많은 이집트 지식인들은 '셀림 1세 거리'라는 명칭을 오스만 압제와 투르크인 폭군의 지배 아래 시달린 이집트 아랍인이라는 기억과 연관짓는다. "이집트인을 죽인" 술탄 셀림 1세와 오스만 제국의 이집트 정복과 "비잔틴 제국과 싸웠지만 이집트인을 죽이지 않은"7세기 아므르 이븐 알 아스(Amr ibn al-As)가 이끈 아랍 무슬림의 이집트 정복을 구분하는 두수키 교수의 주장은 아랍인과 투르크인, 아랍인의 영광을 가져온 7세기 아랍 무슬림의 정복과 아랍인의 쇠퇴, 퇴보, 침체, 외세에 대한 종속을 가져온 16세기 오스만인의 지배를 구분하는 20세기 아랍 지식인들의 이분법적 세계관을 분명히 보여준다. 두수키 교수는 마지막으로 반문한다: "우리가 어떻게 이런 폭군의 이름을 영원히 남겨둘 수 있겠습니까?"


이처럼 아랍 정치지도자들과 지식인들은 투르크인 - 오늘날에는 터키인과 터키 - 을 중대한 위협으로 간주할 때 오랜 세월 동안 마치 역사적 '사실'처럼 자리잡은 투르크인 그리고 오스만 제국에 대한 고정관념과 부정적 편견이라는 해묵은 무기의 먼지를 털어내고 다시 꺼내든다. 투르크인에 대한 편견을 최초로 형성했던 압바스 시대의 정치적, 사회적 환경은 1,000년 전의 이야기이지만, 그 편견과 고정관념의 생명력은 아직까지 이어지고 있다.


참고문헌

Dietrich Jung. "Turkey and the Arab World: Historical Narratives and New Political Realities." Mediterranean Politics 10, no. 1 (May 2005): 1-17.

Hugh Kennedy. "The Caliphate." In A Companion to the History of the Middle East, edited by Youssef M. Choueiri, 52-66. Malden: Blackwell Publishing, 2005

Rifaat Ali Abou-el-Haj. "The Social Uses of the Past: Recent Arab Historiography of Ottoman Rule." International Journal of Middle East Studies 14, no. 2 (May 1982): 185-201.

Şuhnaz Yilmaz and İpek K. Yosmaoglu. "Fighting the Spectres of the Past: Dilemmas of Ottoman Legacy in the Balkans and the Middle East." Middle Eastern Studies 44, no. 5 (2008): 677-693.

Ulrich W. Haarmann. "Ideology and History, Identity and Alterity: The Arab Image of the Turk from the ’Abbasids to Modern Egypt." International Journal of Middle East Studies 20, no. 2 (May 1988): 175-196.

Yasir Suleiman. "Nationalism and the Arabic Language: An Historical Overview." In Arabic Sociolinguistics: Issues and Perspectives, edited by Yasir Suleiman, 3-24. London: Routledge, 1994.


각주


  1. Haarmann, 176-177. [본문으로]
  2. Haarmann, 177. [본문으로]
  3. Kennedy, 63. [본문으로]
  4. Haarmann, 179. [본문으로]
  5. Ibid., 180. [본문으로]
  6. Ibid. [본문으로]
  7. Ibid. [본문으로]
  8. Ibid. [본문으로]
  9. Ibid. [본문으로]
  10. Ibid., 181. [본문으로]
  11. Ibid., 182. [본문으로]
  12. Ibid. [본문으로]
  13. Ibid., 183. [본문으로]
  14. Ibid. [본문으로]
  15. Ibid., 185. [본문으로]
  16. Ibid., 184. [본문으로]
  17. Abou-el-Haj, 186. [본문으로]
  18. Jung, 6. [본문으로]
  19. Abou-el-Haj, 186; Suleiman, 6-10. [본문으로]
  20. Abou-el-Haj, 187; Yilmaz and Yosmaoglu, 678-679. [본문으로]
  21. Yilmaz and Yosmaoglu, 679; Jung, 4. [본문으로]
  22. Yilmaz and Yosmaoglu, 679. [본문으로]
  23. Abou-el-Haj, 187. [본문으로]
  24. Haarmann, 175, 187; Abou-el-Haj, 193-194.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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